[문화] "민족반역자" 서로 욕했다…인민공화국·한국민주당 삐라戰 [김성칠의 해방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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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통계학·전 고려대) 교수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역사학) 박사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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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13일 〔4시 기상. 눈 오고 비 오다〕

짐 묶어서 정거장에 내느라고 종일 고생.

낮차로 가족부터 먼저 떠나보내다.

4천5백 냥(兩)에 온다던 화차(貨車)가 정작 오긴 왔으나 선금을 내라거니 낼 수 없다거니 하는 통에 역장이 잘 교섭해서 2천2백 냥으로 낙착이 되었다. [해설: “냥”이란 화폐단위는 “원” 대신 쓴 것 같은데, 바꿔 쓴 이유는 알 수 없다.]

저녁땐 박제훈 씨 댁에서 만찬 대접.

밤늦게까지 화차에 짐 싣는 걸 끝내고 신(新) 이사 이삿짐 날라온 차로 제천읍엘 나가서 청전리서 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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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14일 〔5시 기상. 개다〕  

새벽 아침 먹고 청전리를 나서서 대흥상점에 셈 치르고 아홉 시 자동차로 봉양을 나와서 조합장 댁에서 점심 대접받고 두 시 차로 출발. 유의순, 윤필원, 염병준 세 사람이 동행. 역두에 전송하러 나온 여러분에게 다 같이 힘써서 좋은 새나라를 이룩하자고 간단한 인사말을 하였다.

윤명원(尹明遠) 씨의 명주(明紬) 한 필, 조합 직원 일동 백원, 임순경(林淳敬) 씨 30원, 기타의 전별이 있었다. 비망(備忘)으로 이걸 적는다. 김장수(金璋洙) 씨 50원, 경희(璟熙) 60원 등 유재홍(柳在烘) 150원.

작년 3월 전란통에 이곳엘 부임할 땐 이른 봄바람이 쌀쌀하였다. 이제 거진 이태 동안의 가장 어려운 시절을 여기서 지내고 비록 따뜻할망정 12월의 엄동설한에 다시 이곳을 떠나게 되니 감개무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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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마다 승객도 밀리지만 그보다도 음식장사가 더 많아서 엿장수, 김밥장수, 떡장수, 술장수, 국수장수, 담배장수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심지어 냉수를 떠다주고 50전씩 받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런데도 봉양만은 장사치가 하나도 없는 것을 동행 직원들이 지적하고, 그것은 조합에서 구휼사업으로 무료급식을 했기 때문에 그네들이 돈 받고 팔 수도 없었으려니와 그보다도 구휼사업의 영향으로 염치지심(廉恥之心)이 길러져서 그 사업이 끝난 오늘날도 음식장사가 하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밤에는 신설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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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15일(土) 〔개다〕

새벽에 청량리역으로 나가서 김태동(金泰東) 씨란 친절한 분을 만나서 열차번호 1904를 용이히 용산역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화물자동차를 구하다 못해서 오늘은 짐을 나르지 못하고 유흥상(柳興相) 씨 댁에 여러 가지 신세를 졌다.

밤에는 이재형(李載瀅) 댁에서 술 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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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16일 〔비 오다〕

아침에 용산역엘 가서 ○○○ 씨의 친절한 주선으로 화차를 구내로 돌려다 놓고 윤 씨의 오토바이로 종일 짐을 날랐다. 장작은 마차로 열두 차 나르고. 하루 동안 비 오는 중을 맹활동하였다. 나중에 유흥상 씨의 감상담(感想談)이, 그날 일하는 걸 보면 무슨 일이라도 능히 해낼 수 있으리라고 해서 웃었다.

상해(上海) 갔다 온 처삼촌, 조합에서 온 직원들의 협력으로 일이 잘 되어나갔다. 특히 염병준 군에게 감사한다.

박 선생 댁에 장작을 한 바리 실어다 드렸다.

권태원(權泰元) 씨가 영사를 가지고 일부러 찾아오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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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17일

날씨가 밤사이 몹시 추워졌다.

이사가 거진 끝나고 이런 혹한이 닥치는 것이 생각할수록 고마운 일이다. 전에 어머님이 흔히 말씀하시던 천지신명님에게 감사한다.

아침에 출근했다가 일찍 돌아와 보니 염병준, 이선호(李先鎬) 양군이 인부들을 데리고 장작을 날라다 싣느라고 큰 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이 추위에 그 신근(辛勤)함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팔판정 모(某)씨 댁에 갔더니 전날 주겠다는 옷장을 선금을 받지 않았다고 팔지 않는다고 한다. 그동안 물건값이 오른 때문이리라. 도척(盜跖)이의 심사도 이렇든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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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18일 〔혹한〕

서정하(徐廷夏) 씨가 취직으로 찾아왔기에 박원식(朴元植) 씨에게 소개하였다. 낮에는 일찍 나와서 짐 끄르다.

저녁엔 이웃 임흥식(林興植) 씨 댁에서 과장회의 한다고 나오란 말이 있었으나 몸이 아프다 핑계하고 나가질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의제(議題)는 연합회 중역진을 부내(部內)에서 속히 정비할 것과 본관의 1층만이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과 그리고 불공(不恭)한 직원의 징계처분이었다고 한다. 하나도 신통한 수작이 없다. 모두 제집 빼앗기고 셋방살이하면서 징징거리는 못난이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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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19일  

날씨가 약간 풀리는 것 같다.

참사 김주인 군과 서기 최영식(崔英植) 군(제주도 출신)이 내 부재중에 싸우고 최 군의 언동이 대단히 불공하며 하극상하려 한다고 해서 간밤의 과장회의에 상정되어서 결국 주무과장의 단호한 처분을 기다리기로 되었다고. 김 군이 나에게 최 군의 징계 면직을 요구한다.

최 군은 출근이 항상 늦고, 시간 중에도 흔히 자리를 비우고, 자리에 있어도 일을 감 잡아 하지 않는 등 나로서 보아도 그리 좋은 직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김 군 자신도 내 눈에는 최 군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는 것 같다. 나는 빠담뿡 해도 너는 바람풍 하라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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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히 일선 조합에서 새로이 임명되어온 중견층들이 그저 잠자코 일을 부지런히 해나가서 저절로 어떠한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서 전부터 있던 사보타주의 직원들까지 그러한 분위기에 자연히 물들게 해서 저네들은 우리들을 심복(心服)해서 따르고 우리는 저네들을 따뜻한 심정으로 이끌어 나가야지, 그저 덮어놓고 이놈들 나쁜 놈들 하고 대립적으로 나가고 힘으로 그네들을 몰아세우는 것은 결코 양책(良策)이라고 할 수 없다.

그네들에게도 가지가지 마음의 오뇌(懊惱)와 불복(不服)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처지와 뒤바꿔 생각해서 그 마음을 일일이 헤아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저 표면적인 사상(事象)만을 지적해 가지고 함부로 구박 주는 것은 양심적인 조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들도 부임해서 시일이 옅고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불집부터 쑤시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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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열한 시부터 임시정부 개선 환영행진이 있다고 해서 전차도 움직이지 않고 MP와 경관들이 가두에 늘어서서 경위(警衛)가 대단하다. 책상을 사려고 염 군과 함께 황금정 일대를 두루 뒤졌으나 구하지 못하고 피곤하기만 하다.

거리에는 꽃전차가 화려하고 광복군과 소년군의 행진이 장엄하고 유량한 나팔소리에 울려나오는 애국가의 멜로디가 이때까지 일본 일색의 가두데모만 보아오던 나에게는 눈물겹도록 기쁜 현상이지만 한편으로 인민공화국 측과 한국민주당 측이 서로들 민족반역자라 욕하고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격렬한 삐라를 돌리는 것이 마음 아픈 노릇이다. 이 우매한 정치광(政治狂)들과 탐권배(貪權輩)들이 선량한 동포들을 항쟁의 구렁으로 몰아넣고 조국의 광복에 일말의 암운(暗雲)을 끼치게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들의 북새통에 몇십 리 길을 걸어오면서 이러한 걱정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해설: 여운형이 주도하던 건국준비위원회를 계승한 조선인민공화국(1945. 9. 6)은 독자적 정권을 자임했고, 한국민주당(1945. 9. 16)은 임정 봉대(奉戴)를 명분으로 이에 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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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漢字) 철폐운동의 소문을 듣고 게으른 중학생들이 공부를 소홀히 한다니 세상일은 진실로 간단히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한자 전폐(全廢)는 장래의 이상이고 지금의 소학 하급생부터 실시해야 할 것이며 현재 중학생들은 물론 부지런히 한학 공부를 해서 우리 고유문화의 소화에 유감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영어 전폐운동과 꼭같은 일이다. [해설: 대동아전쟁 시기 일본에서 영-미 문화를 배척한 풍조를 말한다.] 이 성스러운 운동이 일부 중학생들의 나태의 구실이 된다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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