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골프를 즐기고 싶어요” 행복 찾아 떠난 천재소녀 이정현
-
2회 연결
본문

이정현
이정현(19)은 13살이던 2019년, 역대 최연소로 여자 아마추어 골프 메이저대회(송암배)에서 우승했다. 2020년에는 한국여자아마추어 선수권을 제패하며 최연소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당시 이 소녀는 “LPGA 투어에서 100승을 거두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골프 여제’ 안니카 소렌스탐의 뒤를 이을 것만 같았던 그는 그러나 어느 순간 골프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지난 7일 서울 노들섬에서 만난 이정현을 만났다.
이정현은 모든 걸 다 갖춘 천재였다. 장타에 쇼트게임도 완벽했고, 새벽엔 모래사장을 달리고 아침·저녁으로 줄넘기를 1000개씩 하는 굳은 의지도 있었다.
아버지도 훌륭했다. 주변에서는 “한국 골프 대디 중 가장 헌신적인 사람”이라 평했다. 지방 대회가 끝나면 밤에 서울로 올라와 레슨을 받고, 다시 밤길을 달려 대회장으로 향했다. 딸은 차에서 잘 수 있었지만, 아버지에겐 쉴 틈이 없었다.
“365일, 24시간 내내 아빠와 붙어 지냈어요. 뉴질랜드에서 1년여 훈련할 때는 아침·저녁을 챙겨주시고, 학교에 데려다 주셨죠. 제가 수업에 간 동안 연습장의 공을 다 주워야 했고요.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영어 한 마디 못하던 아버지가 그곳에서 공황장애까지 겪으셨대요.”
그는 “중학교 2학년, 국가대표가 된 뒤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하했다”고 기억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KLPGA 메이저 대회 전날, 우연히 스윙 레슨을 받은 후 본격적으로 슬럼프에 빠졌다. 평소 귀가 얇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이후 공이 똑바로 안 날아갔다. KLPGA 프로 대회에서도 중상위권을 차지하던 그는 아마추어 대회에서도 컷 통과가 어려워졌다.
“오랫동안 샷이 안 좋았는데 그런 얘기를 할 성격도 아니었죠.”
한국 여자골프에는 이정현 이전에도 한정은이나 성은정 같은 ‘차세대 소렌스탐’이라 불린 유망주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릴 때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 올렸음에도 기대만큼 꽃을 피우지 못했다.
어린 시절 우승컵은 해가 뜨면 빛나지만, 비바람이 몰아칠 땐 무거운 짐이 된다. 자신보다 성적이 낮던 동료가 성장하면, 제자리걸음인 자신을 자책하게 된다. 이는 과도한 조기 성취, ‘오버페이스’의 그림자다.

이정현이 지난 7일 노들섬에서 한강을 가르키고 있다. 어린시절부터 골프에 전념한 이정현은 ″한강을 처음 봤다″고 말했다. 성호준 기자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더 있었다. 똑똑하고, 착했다는 것이다. 소아 심리학자들은 “똑똑한 아이일수록 부모를 기쁘게 하려는 욕구가 강하다”고 말한다. 이정현도 그랬다. “저를 도와주는 분들께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아버지는 완전히 저를 위해 사신 분이었으니까요.”
이정현은 주위 사람들 실망시키는 걸 용납할 수 없는 성격이다. 골프가 잘 되지 않자 패닉에 빠졌다. 친구도 거의 없었다. 또래들에게 이정현은 너무나 뛰어난 선수여서 다가가기 어려웠고, 늘 아버지와 함께하다 보니 친구와 속마음을 나눌 시간도 없었다.
지난해 8월, 그는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의 베일러대학에 골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아버지와 떨어진 홀로서기였다. 캐리어 세 개와 골프백을 끌고 혼자 미국으로 가 자동차도 없이 한 학기를 버텼다. 각오는 했지만 외로움은 예상보다 컸다.
“이렇게 외로울 줄 몰랐어요. 그래도 버티다 보니 배우는 게 많았고, 1년이 지난 지금은 내가 많이 변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가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가장 달라진 건 골프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예전엔 골프가 재미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고통 속에서 버텨야 남들보다 잘할 수 있다고 믿었죠. 하지만 성취감은 잠깐뿐이었고, 어느 순간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생겼어요. 미국에 와서 깨달았어요. 골프는 즐기면서, 남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 치는 게 중요하다는 걸요.”
마음 속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받아들이고, 집착하지 않으려 한다.
“골프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른 일을 하면서 힐링이 돼요. 공부도 하고, 춤도 추고, 여행도 다녔어요. 오늘은 한강을 처음 봤네요. 마음을 풀어놓으니 기분이 좋아요.”
올해는 UCLA로 옮긴다. LA에는 그의 부활을 믿는 한국계 코치, 한국 음식, 코리아 타운이 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풀어 줄 한국의 최고 스타 손흥민까지 왔다.
과거의 기량을 완전히 회복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더 이상 고통 속에서 살지는 않을 듯하다. 이정현은 “이제는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라고 했다.
골프 멘탈 전문가인 이종철씨는 “성적과 랭킹에 집착한 플레이보다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즐거움, 내 감각의 테스트, 도전에서 느끼는 스릴감, 경쟁에서 오는 흥미 등 자신만의 재미를 추구하는 골프를 하면서 결과가 아닌 과정에 집중할 때 성적은 자연스레 따라온다”라고 말했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xxxxxxxxxxxxxxxxxxxxxxxxx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