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군뉴스] 2025 태봉학술회의-태봉과 지방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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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태봉학술회의가 올 10월17일 철원군평생학습관 강당에서 '태봉과 지방세력'을 주제로 개최됐다.

강원일보사와 철원군, 태봉학회, 신라사학회 등은 지난달 17일 철원군 평생학습관 강당에서 '태봉과 지방세력'을 개최했다. 이날 태봉학술회의에서는 태봉의 역사문화권설정 포함을 위한 당위성과 함께 '태봉과 지방세력'을 주제로 태봉 및 궁예를 연구해온 학자들의 다양한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조인성 태봉학회장(경희대 교수)

■기조발제

◇조인성 태봉학회장(경희대 교수)(태봉역사문화권 설정의 당위성과 의의)=“우리나라 고대역사문화권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기 위한 역사문화권 정비법은 2020년 6월에 제정됐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 마한, 탐라 등 6개 역사문화권이 설정됐고 2022년에 중원역사문화권과 예맥역사문화권이, 2023년에는 후백제역사문화권이 추가로 설정된 상태다.

후삼국시대 패권을 다퉜던 후백제가 역사문화권에 포함된 만큼 당시 후삼국의 질서를 주도했던 태봉의 역사문화권 정비법 포함은 당연하다는 것이 많은 연구자들의 시각이다.

태봉은 904년 광평성을 비롯한 병부와 대룡부, 외국어 통역을 맡은 사대를 비롯해 여러 특수 관부를 설치했다. 또 정광 등 9개 품직을 설치하는 등 나라의 체제를 정비했다. 공주 장군 홍기가 항복한 904년을 기점으로 충청지역에서 후백제에 우위를 차지했고 906년에는 상주 점령, 909년 무렵에는 나주 일대를 장악해 후백제 배후를 위협하는 등 전국의 3분의2를 차지했다. 911년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바꾸고 연호를 수덕만세라고 했던 것은 이러한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태봉의 역사적 위상을 볼때 역사문화권 설정은 마땅하다고 볼 수 있다.”

◇홍창우 전남대 HK연구교수

■주제발표1

◇홍창우 전남대 HK연구교수(궁예 정권과 '지방'과의 관계문제, 청주·나주 중심으로)=“궁예가 점령한 지역에 대한 어떤 조치 또는 직접적인 관계를 살펴볼 만한 정보가 많지않다. 그마저도 특정되어 있는 지역이 바로 청주와 나주다. 궁예는 904년 철원을 도읍으로 삼으며 청주 주민 1,000호를 철원으로 옮기는 사민정책을 단행했다. 당시 이 지역에 많은 인구가 살았을 것이라는 연구가 있지만 청주의 정확한 당시 인구는 확인하기 어렵다. 또 지방사회의 문화 중심지 역할을 청주가 담당했기에 이를 철원에 이식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과 군사집단의 집단이주라는 연구도 흥미롭다.

나주는 궁예정권에서 최초로 금성을 공략한 시점과 이곳을 '나주'로 개편한 시기의 문제, 이를 전하는 자료 간의 간극 등 여러 연구가 진행 중이다. 청주와 나주를 차지한 태봉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김병희 경기대 초빙교수

■주제발표2

◇김병희 경기대 초빙교수(건국 전후기 궁예의 지방세력에 대한 통합 및 영토확장에 대한 재검토)=“궁예는 양길 휘하에서 석남사에 머물며 동쪽의 주천과 나성, 울오, 어진 등을 차례로 공략해 성공했고 이후 명주(강릉)을 차지해 3,500여명의 무리를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만들며 자립한다. 궁예는 이후 저족과 성천, 부약, 금성, 철원 등을 차례로 차지하고 패서의 지방세력까지 접수한다. 이후 양주와 견주 등지에서 양길과 맞붙는데 최근 출토된 태봉국 목간을 고려할 때 견주는 양주 대모산성을 가능성이 크다. 궁예는 899년 비뇌성 전투 등을 통해 양길과의 대립에서 승리한다. 본 연구자는 '비뇌성'의 위치가 근래에 지지를 받아온 안성 죽주산성 대신 충주시 앙성면에 위치한 '비내섬'으로 추정한다. 꼭 '비내섬'이 비뇌성이 아니더라도 북원과 국원(충주)를 잇는 남한강 구간에서 비뇌성을 찾아야 할 필요성이 크다고 본다.”

◇정성권 단국대 연구교수

■ 주제발표3

◇정성권 단국대 연구교수(지방장인에서 국장으로, 태봉과 고려 전환기 국공의 등장과 활약)=“태봉과 고려의 전환기는 미술사적·기술사적 측면에서 장인 제도의 구조적인 전환이 이뤄진 시기다. 궁예 정권 아래서 활동한 장인 집단은 국가 소속의 공인으로 자리잡았다.

철원 풍천원 석등과 포천 철조여래좌상 등은 태봉시기 장인집단의 미술적 역량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 유물은 명주지역 불교미술의 조형 계통을 계승하고 조각 수법과 비례감, 의문 처리 등에서도 공통된 조형 감각을 드러낸다. 태봉의 국공들이 명주지역 장인 전통을 토대로 형성된 집단임을 시사한다.

고려 건국 이후 왕건은 개태사 창건과 석조삼존불입상 등을 조성했다. 개태사 불상은 조형양식과 제작수법에서 태봉시기 안성 기솔리 석불입상 등과 직접적인 친연성을 보인다. 이는 태봉계 장인집단이 고려왕조에 포함됐음을 뒷받침한다.”

◇조경철 연세대 객원교수

■ 주제발표4

◇조경철 연세대 객원교수(궁예와 왕건의 서남해안 경략과 불교)=“2011년 최연식 교수는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해석하면서 궁예가 나주 경략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하일식 교수는 나주 경략의 주인공은 왕건이라는 주장을 내놓으며 선각대사비 해석 문제가 학계의 뜨거운 논쟁으로 떠올랐다.

본 연구자는 선각대사비 찬술과정 당시 궁예에 대한 평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선각대사 형미는 917년 궁예에게 죽임을 당했고 이듬해인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왕건은 919년 개성 오관산에 선각대사의 승탑을 세웠다. 승탑을 세웠다면 분명 탑비도 계획했을 것이다. 탑비를 통해 궁예가 선각대사를 죽인 포악성을 드러내고 왕건의 고려 개창을 정당화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삼국 시대의 어려움 때문이었는지 946년에 이르러서야 무위사에 선각대사비가 세워진다. 이 비는 최언위가 썼다. 선각대사비에는 '걸주'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폭군을 뜻하고 즉 궁예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같은 표현만으로 궁예가 당시 폭군으로만 인식됐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선각대사비에는 궁예를 '전주(前主)'로도 표기했다. 이는 '걸주'와는 결이 다르다. 944년 세워진 법경대사 경유의 비석에는 궁예를 '선왕'이라 부르고 있다. 이 비도 최언위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선왕이라는 표현은 궁예가 정식 왕이었다는 뜻이다. 궁예의 당시 평가가 부정적인 면만이 부각됐다면 '선왕'이 비석에 새겨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궁예에 대한 당시 평가는 이중적일 수 밖에 없었다. 여러 금석문의 해석을 따져보면 궁예가 나주 경략에 직접 나선 것에 무게를 실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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