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오피스의 고장난 시계, 고치려다 말았더니 생긴 일 [김성칠의 해방일기(18)]

본문

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통계학·전 고려대) 교수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역사학) 박사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11월 1일 개였다 흐렸다 비오다. (목)

17462207837489.jpg

아침엔 문자학(文字學)상의 한글의 지위 이야기.

낮에 윤 학자님이 찾아오셨기에 열하일기의 의문되는 점 몇 곳을 물어보았더니 명확한 해석을 나리시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직원들과 함께 술 한 잔 나누고 급히 서둘러서 오후 차로 강 군과 함께 원주 행.

열차는 갈수록 더 붐비는 것 같았다.

원주서는 밤에 비가 한줄금 좋이 왔었다. 나중에 들으니 봉양서는 두세 방울 뿌리다 말았다 하니 치악산을 사이에 두고 이렇듯 청우(晴雨)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밤에 여관에서 이 씨에게 사의(辭意)를 누설하였다.

11월 2일 개고 바람불다.

17462207842982.jpg

아침 조회시간에 이야기.

우리 오피스에 있는 시계가 다소 늦가는 것을 몇 번 고쳐보았으나 잘 되지 않아서 그냥 두었었다. 오피스 사람들은 늦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별 일 없으나 때로는 학교에 가는 아이들, 정거장에 차 타러 가는 손님들이 들여다보고 시간을 잘못 아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일언일행이 우리의 주위에 뜻하지 아니한 영향과 파문을 일으키는 일이 많을 것이다.

즉 우리들은 스스로 의식지 못하고 사회의 의표(儀表)가 되는 경우가 있다. 너희들은 언제든지 일개 미미한 여생도라고만 생각지 말라. 너희들이 학교에 오가는 길에서나 혹은 집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하는 거동이 모두 사회의 환시(環視) 속에 있나니 대수롭지 않은 일이 너희들의 일생에서나 또는 이 신명학교에서나 또 혹은 조선 여성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일이 많고 때로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함을 명기하라. 항상 사회적인 책무를 자각해서 자중자애하라. 이것은 전번 조회시간에 말한 전체(全體)와 개(個)의 문제와도 관련되는 일이다.

17462207847917.jpg

즉 전체는 개가 모여서 이뤄지는 것이지만 개를 떠나서 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전체의 향상도 물론 개의 향상을 기다려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와 반대로 개의 퇴보는 그게 다만 하나일지라도 그만큼 전체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얼핏 생각하면 우리 학교에는 생도가 백 명이나 있으니 나 하나쯤 좀 흥떵거린들 어떠랴, 나 하나쯤 이 조그만 종이쪽을 여기 떨어트린들 어떠랴, 나 하나쯤 길거리에서 잠시 한눈파는 것이야 어떠랴 하고 생각 들기 쉽지만 그러한 생각은 전체를 구성하는 한 개인 자기 자신을 천시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그러한 생각이 번지면 전체를 망치기에 이를 것이다.

17462207853486.jpg

3천만이나 되는 많은 조선사람 중에 나 하나쯤 게으르면 어떻고 나 하나쯤 술 마시고 노름한들 어떠랴 하는 생각은 조선을 멸망에로 이끌 것이다. 3천만 하나하나가 모두 조선의 새 건설을 나부터 힘쓰자, 내 자리를 잘 지켜서 거기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자, 함으로써만 조선의 앞날은 빛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명학교는 나부터 남보다 먼저 깨끗하게 하자 하고 일백 명 생도가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면 학교는 저절로 깨끗하게 될 것이다. 일백 명 생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지런히 공부하면 신명학교는 곧 훌륭한 학교가 될 것이다. 또 그렇게 하는 수밖엔 달리 이 학교를 깨끗하게 하고 훌륭하게 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個)인 생도를 떠나서 전체(全體)인 신명학교가 없기 때문이다.

17462207858918.jpg

우리 하나하나를 떠나서 조선민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 하나쯤, 하는 생각도 물론 나쁘지만 내 하나가 아무리 힘쓴들 이 큰 덩어리인 전체가 어찌 잘 되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또한 나쁘다. 설사 다른 사람이 다 어긋난 길을 걸을지라도 나만은 옳은 길을 걷고 이 옳은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 모두 따라오게 해야 한다는 기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주저앉아 버린다고 나도 주저앉는다면 전체는 다시 헤어날 길이 없다. 나 혼자만이라도 주저앉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 나가고 또 다른 사람들을 부추겨 일으켜서 이끌어 나가야만 전체에 광명이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이런 기개를 지닌 사람을 더 많이 가진 전체는 다행할 것이요, 또 그와 반대로 한 사람이라도 남이 다 주저앉으니 나도 주저앉아 버리겠다든가 또는 이 많은 사람 중에 나 하나쯤 주저앉은들 어떠랴 하는 사람이 더 많은 전체는 불행할 것이다. 전체와 개는 이렇듯 절대적인 관련을 가진 것이다. 전체를 떠난 개가 없고 개를 떠난 전체가 없다. 일본이 패배한 후의 일본사람의 비참한 현실을 보라. 그래도 전체를 떠난 개인이 있을 것이냐. 그래도 조선과 조선민족이야 이찌 되든 나 하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17462207864151.jpg

17462207869097.jpg

세상에는 흔히 큰 집이 기울어지려 함에 기둥 하나로 버티지 못한다는 말을 쓴다. 나는 이 말을 심히 불유쾌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조선이 기울어져 가고 조선민족이 그릇된 길을 걷고 있을 때 조선사람 하나하나가 기둥 하나로 버티지 못한다는 생각을 지닌다면 이 큰 집은 대체 누가 지탱해줄 것이며, 지탱해 줄 이가 없다면 그 큰 집의 운명은 끝내 어떻게 될 것인가. 그와 반대로 조선사람 하나하나가 조국과 동포라는 우리의 전체가 기울어지려 하니 그를 구성하는 개인 우리는 그와 운명을 같이 할지라 어찌 안연히 건너편 산의 불 보듯 할 수 있으랴 하고 내 한 기둥이나마 끝까지 이 큰 집을 버티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어디까지든지 버틴다면 반드시 광란(狂瀾)을 기도(旣倒)에서 돌이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남은 다 안연히 좌시하는데 내 혼자 이런들 어쩌리 하는 공리적인 타산을 버리라. 전체의 운명은 결국 이러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가 저러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가 하는 데 달렸다는 것을 알라.
[해설: “광란을 기도에서”는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나오는 말로, “미친 듯한 물결을 이미 뒤집어진 상황에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전체는 개를 떠나서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은 우리들의 조선이지 우리들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운명은 그 전체를 구성하는 개가 짊어져야 한다. 조선의 운명은 조선사람 하나하나가 떠메고 가야 한다. 나는 떠메지 않아도 남이 떠메고 가려니 하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우리들이 아니면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건 조선을 떠메고 나갈 사람이 없다.

17462207874492.jpg

설사 있다더라도 그것은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불행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그 우리란 또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로써 구성단위(個)를 삼는 집합체요, 조직체다. 그 구성단위인 여러 “내”가 모두 서로 미루고 일하지 않는다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누가 일하고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우선 나부터 일하고 나부터 책임을 지자. 나 혼자만이라도 기울어져 가는 이 전체를 바로잡아 나가자. 이래야만 진정한 개의 자기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개의 자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가 잘 되어 나가고 못 되어 나가는 것은 이러한 자각에 철저한 개가 하나라도 더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다.

17462207879555.jpg

큰 집이 기울어지려 함에 기둥 하나로 버티지 못한다는 말은 망국에로 통하는 길이다. 무자각한 개의 자기 위안이요 자기 변호라고밖에 볼 수 없다. 예를 든다면 이 신명학교가 청소가 잘 되지 않아서 교실이나 운동장이나 구석구석이 먼지가 앉고 쓰레기가 쌓인다 하자. 그러할 때 생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것은 우리 학교니 우리 손으로 깨끗하게 하자는 생각으로 힘써 자기의 주위를 닦고 쓸고 쓰레기도 버리지 않고 해야 할 것인가 또 혹은 남들이 다 지저분하게 하는데 나 혼자 깨끗하게 한들 무엇하리, 또 이 넓은 학교 이 지저분한 학교가 대관절 내 혼자 힘으로 깨끗하게 되기나 할 것인가 하고 생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렇게 생각해 옳을 것인가. 그리고 또 아따 이왕 깨끗지는 못한 판이니 이웃 닭이 와서 운동장 구석에 보금자리를 치고 마을 개가 와서 교실 앞에 똥을 누면 어떠랴. 여럿의 학교인데 내 혼자 나서서 닭과 개를 쫓을 것이 아니다. 그러다 닭과 개 임자에게 욕이나 먹으면 내가 괜한 손해가 아니냐. 그것은 명철보신 하는 길이 아니다 하고 모든 생도가 이렇게 조선의 한학자(漢學者) 시늉을 하면 대체 우리의 학교는 어떤 꼴이 될 것인가.

17462207884817.jpg

이와 반대로 생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학교는 내 손으로 깨끗하게 하리라. 아무리 지저분한 학교더라도 나부터 먼저 내 주위부터 차츰 깨끗하게 해 나가서 학교 전체에 미치게 하리라 하는 생각으로 나간다면 학교는 이내 아름다운 학원(學園)으로 변할 것이다. 설사 일백 명 생도가 한꺼번에 다 그러한 생각을 가질 수 없다더라도 다만 한두 사람만이라도 그러하면 이 좋은 기풍이 차차 여러 사람에게 번질 것이요 또 그러한 생도(개)가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은 학교(전체)를 그만큼 다행한 길로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내 혼자서야”, “나 하나쯤이” 하는 그릇된 생각을 가질 것이랴.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52,033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