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놀면서 보조금 못받자 "또라이"…아르헨 아직 '페로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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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살린 밀레이 ‘전기톱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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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의회 인근에서 열린 1000번째 수요 시위 장면. 김상진 기자

미친놈(Le Loco).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별명이다.

이글거리는 눈, 마구 헝클어진 머리, 불규칙 바운드로 튀는 언행… 이런 겉모습만으로 밀레이의 별명이 만들어진 건 아니다. 그를 겪어본 사람들은 딱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한다.

“여러 번 만나 보니 제정신이 아니더라. 그는 무정부주의자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더라. 또 작은(50㎡) 아파트에 혼자 살면서 큰 개를 네댓 마리나 길렀다. 월급을 개에게 다 쓴 탓에 제대로 못 먹어 그런지, 내 사무실에 오면 테이블 위의 과자를 깡그리 먹어치우곤 했다. 원래 제정신 아닌 사람들이 재미있긴 하지만,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됐다는 건 심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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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무역부 장관(2006~2013)을 지낸 골수 페론주의자로 ‘원칙과 가치’라는 정당의 당수인 기예르모 모레노(70)가 들려준 말이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논쟁적 정치인이자 기인인 모레노의 눈에도 밀레이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쳤던 모양이다.

그 밀레이가 네오리버럴리즘의 원조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아르헨티나를 시장경제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각종 인터뷰와 자료 등을 토대로 Q&A 형식으로 접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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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 기차역 레티로에서의 출근길. 김상진 기자

Q 밀레이는 뭐하던 사람이었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산층 가정에서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부친에게 자주 얻어맞으며 컸다. 음악에 재능을 보여 록밴드의 리드 보컬을 했고, 주니어 축구클럽에선 골키퍼로 꽤 활약했다. 1980년대 후반 하이퍼 인플레를 겪으며 경제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명문 벨그라노 대학(UCEMA)에서 경제학 학사를, 이어 경제사회개발연구소(IDES)와 토르콰토디텔라 대학(UTDT)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두 개 취득했다. HSBC은행과 맥시마 AGJP 자산운용에서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일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2010년대 중반 TV에 출연해 신랄한 어조, 괴짜 이미지, 록스타풍 외모로 주목을 받았다. 수퍼히어로 복장으로 등장하거나 전기톱 퍼포먼스를 하는 등 강한 시각적 메시지로 화제를 모았다. 2021년 11월 신생 자유전진당(LLA) 후보로 하원에 입성했고, 2년 뒤 대선에서 승리하며 초고속으로 대통령이 됐다.

미국의 일론 머스크와도 가까운 사이다. 올해 초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전기톱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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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현민 기자

Q 어떻게 자유지상주의를 신봉하게 됐나.
머레이 로스바드의 『인간 경제 국가』(1962)를 읽고 오스트리아 학파의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로스바드는 오스트리아 학파 내에서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루트비히 폰 미제스에 비해 극단적인 자유주의를 주장한다. 국가를 없애야 한다는 식의 무정부주의 색채가 짙다. 밀레이가 아나코-캐피탈리스트를 자임하는 데엔 로스바드의 영향이 크다.

Q 오스트리아 학파란 무엇인가.  
1871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카를 멩거가 『경제학 원리』를 통해 자유시장주의를 주장했고, 이에 동조한 제자와 동료들이 합류해 학파를 이뤘다. 시장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작동하므로 국가가 끼어들면 되레 망가진다는 게 핵심 철학이다. 오스트리아 학파라는 이름은 멩거를 비판하던 독일 학자들이 붙였다. 제대로 된 이론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쑥덕공론이라는 비아냥이었다. 이게 폰 미제스, 하이에크, 로스바드 등을 거쳐 자유지상주의 경제철학으로 발전했다.

Q 책 한 권으로 세상 보는 눈이 정해지나.  
증명할 수는 없으나, 아르헨티나의 전기작가 후안 루이스 곤잘레스는 정신분석학적으로 밀레이의 사상적 배경을 설명한다. 어릴 때 부친의 폭력에 대한 반발심리로 극단적인 반권위주의, 반국가주의로 흘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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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취재 중 경찰의 고무탄 세 발을 맞은 장열 기자의 종아리 부위. 김상진 기자

Q 무정부주의자가 어떻게 국가를 통치하나.  
그게 바로 밀레이 정부의 역설이다. 비대해진 국가가 무능과 비효율에 빠져 경제를 망쳤으니, 국가를 최소화시켜 많은 걸 시장에 맡기자는 게 밀레이의 철학이다. 그는 권력으로 이를 실현하겠다며 정치에 뛰어들었다. 1960년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와 루디 두치케가 국가기구 내부에서 자본주의를 타도하겠다며 ‘제도권으로의 대장정’을 좌파의 전략으로 제시했던 것과 비슷하다. 방향만 반대일 뿐, 체제를 내부에서 뒤집어엎자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Q 그는 포퓰리스트인가.  
대중에 직접 호소한다는 면에선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정작 그의 정책은 포퓰리즘과 정반대다. 과거의 인기영합적 정책을 다 폐지하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국민에게 고통 감내를 요구하고 있다. 세상에 포퓰리즘 때려잡는 포퓰리스트도 있나. 국민 뜻이 제일 중요하다, 기본 복지로 국민을 섬기겠다, 재정을 곳간에 쌓아두면 썩는다, 정도는 해야 포퓰리스트다.

Q 그는 파쇼인가.  
아니다. 그는 독재 권력을 추구하기는커녕 의도적으로 정부 권한을 줄이고 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행정명령에 의존해 개혁을 추진하다 보니, 야당이 파쇼라고 비난하는 것뿐이다.

Q 그는 극우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 지도자로 알려지면서 극우 딱지가 붙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워크(Woke) 등 좌파 이념을 혐오한다는 점에서 우파인 건 확실하다. 그러나 이민 규제에 관심이 없고,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점에서 극우와 거리가 멀다.

Q 그는 교조주의자인가.  
그렇게 보일 소지가 있다. 자유지상주의를 신봉한 나머지 반려견 이름도 ‘밀튼 프리드먼’으로 지었다. 연설할 땐 그냥 “자유 만세”라고 외치지 않는다. 꼭 “자유 만세, 빌어먹을(¡Viva la libertad, carajo!)”이라고 내지른다. 마치 앙시앙 레짐을 향해 돌격하는 혁명군의 결의를 연상시키듯 말이다.

하지만 의외로 실용적인 면이 있다. 후보 시절 중국 공산당을 비난했지만, 취임 후 대중 관계를 원만하게 관리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과 회담도 추진 중이다. 지난 3월 남부 지역에 홍수가 났을 땐 긴축에서 벗어나 긴급 재난지원 예산을 편성했다. 또 마약 단속을 강화하는 등 교조적 자유지상주의와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Q 여동생 카리나(52)가 실세인가.  
어릴 적 밀레이가 부친에게 두들겨 맞은 뒤엔 꼭 카리나가 다독여 줬다고 한다. 소싯적부터 밀레이의 카리나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높다. 생활비 관리에서 개 먹이 주기에 이르기까지 카리나가 도맡아 해줬다. 밀레이가 카리나를 ‘보스’로 부를 정도다. 지금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밀레이를 밀착 수행한다. 밀레이 남매와 산티아고 카푸토 자문역이 모든 실권을 쥔 ‘철의 삼각형’으로 불린다.

놀며 보조금 못 받자 시위대 “또라이” 목청…아직 ‘페로니즘’ 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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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그냥 죽으라는 거냐.”

시위대 맨 앞에서 악에 받친 고함이 터져나온다. 지난 3월 12일 오후 아르헨티나 국회의사당 앞. 연금개혁 반대 시위대의 밀라그레스 에레라(41)는 “어머니가 무료로 약을 받았는데 정부가 빼앗아갔다”고 목청을 높였다. 시위대는 ‘또라이 자유주의자’라는 “리베르톤토(Libertonto)”를 연신 외쳐댔다.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을 향한 욕이다.

훌리건이 가세해 폭력 시위로 번지자 경찰은 물대포·최루탄·고무탄으로 진압했다. ‘맑은 공기’라는 뜻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은 매캐한 최루가스와 펑펑 터지는 고무탄 발사음으로 뒤덮였다. 현지 사진기자 파블로 그리요는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중태에 빠졌다. 본지 취재팀 한 명도 다리 등에 고무탄 세 발을 맞았다.

30년간 미래로여행사를 운영 중인 정유석 대표는 “페론당의 퍼주기 정책에 길들여졌는데, 밀레이가 바꾸려다 보니 반발이 심하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일부에선 페로니즘의 향수가 아직 끈끈하다. 놀면서 쉽게 보조금 받았는데, 갑자기 끊으니 반발할 수밖에. 우버 기사 메히야 헤리베르토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밀레이를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욕한다”고 했다.

심한 경우 부지런히 일하는 걸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이민 40년 차인 강남익스프레스 양수민 사장은 “부모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못 보고 자란 이들이 많다. 한 세대가 그냥 무능해졌다”고 말했다.

인식을 바꾸긴 쉽지 않다. 반발과 저항은 거쳐야 할 과정일 수 있다. 킨토 투자자문의 애널리스트 바우티스타 부르디외는 “개혁의 필요성과 저항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페로니즘이라 하면, 후안 페론 전 대통령보다 두 번째 부인 에바 페론을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뭐든 다 해주겠다는 국모로서의 자선이 국가적 복지정책으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포퓰리즘으로 번졌다.

중심가 보건부 청사는 페로니즘의 상징이다. 높이 31m짜리 에바 페론의 금속 초상이 한쪽 벽면을 덮고 있다(사진). 택시 기사 다니엘  에두아르도(61)가 “밀레이가 곧 허물지 모르니 기념사진을 찍어두라”고 했다. 페로니즘의 색채를 빼려는 노력은 건물 철거로 이어질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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