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더버터] 이완용이 만든 '기부금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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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희숙 재단법인 동천 상임변호사
지난해 가을, 한 시민단체 후원자 2000여 명의 계좌 정보가 압수수색 당했다. 이름, 연락처, 생년월일, 자택과 직장 주소까지 수색 된 사실이 3개월이 지나서야 통지되면서 후원자들의 혼란과 분노가 이어지고 있다. 경찰은 비회원 모금액이 1000만원을 넘기면 ‘기부금품법’ 위반이라며 회원과 비회원을 구분하기 위해 개인정보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십시일반 참여한 후원자들까지 옥죄는 기부금품법은 무엇이며,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기부금품법은 미등록 모금에 대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규정한다. 시민 누구든 사전 등록 없이 1000만원 이상 기부금을 모으면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사기나 횡령도 아니고 사전 등록을 안 했다고 형사처벌이라니. 뒤늦게 이 법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사후 등록할 방법은 없다.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이 법의 연원을 찾고자 여러 해외 입법례를 찾아보았지만, 유사한 체계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 발견한 게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만든 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 침탈이 다가오자 일본의 차관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구국을 위한 지식인 양성 목적으로 의무교육운동이 일어났다. 대한제국 국민의 모금으로 학교를 설립·운영해 나가는 교육·자강운동이 확대되자 이를 탄압하기 위한 이완용 명의의 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이 제정된다. 이때부터 허가받지 않은 일체의 모금이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감시망을 피한 모금은 계속되었고, 이에 대응하며 모집비용 사용 금지, 징역형 추가 등 더 강력한 제재가 덧입혀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모집 규제는 해방 후에도 기부금품모집금지법 등 다양한 이름으로 100여 년간 지속되었다. 2006년에 허가제가 등록제로 변경되었으나 모집비용 규제, 징역형 제재 등 규제의 틀은 변하지 않았다. 2006년 법 개정 당시 ‘민간기부에 대해 국가가 과도한 통제를 하는 입법례는 선진국에서는 찾을 수 없으며, 기부하는 시민들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으로, 시민 활동의 활성화를 위해 시대착오적이고 관료주의적 발상에 기인한 기부금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폐지법안이 발의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또 20년 가까이 흘렀다. 그 사이 세법이 강화되어 국세청을 중심으로 한 기부금 감독 체계를 갖추고 투명성이 강조되는 등 많은 사회 변화가 있었지만, 신고제나 자율화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국권침탈·외환위기·비상계엄 등 국가적 위기 때마다 시민은 사재를 내놓고 거리로 나섰다. 극심한 양극화와 성장 정체에 처해있는 오늘날의 위기를 극복할 해답도 여기에 있다. 시민의 연대를 억압해 온 이완용의 유물에 갇혀있을 것인지, 자유로운 모금과 활성화를 위한 새 판을 짤 것인지 선택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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