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400년 동안 빛 못 본 손목시계, 단숨에 히트상품 만든 세계대전[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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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의 시간
레베카 스트러더스 지음
김희정 옮김
생각의힘
우주의 역사와 맞먹는 150억 년 만에 1초 정도의 오차가 생길까 말까 하는 정밀한 원자시계로 시간을 측정하는 현대에 시계는 역설적으로 액세서리화하고 있다. 전 세계인들이 개인 소지 휴대폰으로 매우 정확한 시간을 전송받게 되면서부터 시계를 따로 차고 다니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의 본질적인 기능을 스마트폰이 대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고가 명품 시계들은 출시되자마자 오픈런의 진풍경을 낳는 등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인류와 함께해 오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너머 우주의 질서까지 담은 시계의 역사는 흥미진진하다.

영국 버밍엄 출신의 시계제작자이자 역사학자인 지은이 레베카 스트러더스. [사진 ⓒAndy Pilsbury]
전통적인 시계 제작법을 연구하면서 직접 그런 시계를 만들고 수리도 하는 자칭 희귀종 시계학 박사 레베카 스트러더스가 지은 『시계의 시간』은 한마디로 시계백과사전이다. 시계의 진화 과정에 얽힌 개발자들의 스토리텔링을 한가득 담은 보고다. 다소 딱딱할 수도 있는 시계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수려한 문장으로 단숨에 독자들의 구미를 확 끌어당긴다.
현재 발견된 인류 최초의 시간 측정 도구는 4만40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레봄보 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레봄보산맥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검지 길이 정도의 비비 종아리뼈에는 29개의 홈이 파여 30개의 칸이 표시돼 있다. 이 숫자는 달의 주기를 표시한 게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시계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최초의 자판을 가진 해시계를 비롯해 그림자시계, 물시계, 양초시계, 모래시계, 반지시계 등이 잇따라 세계 곳곳에서 사용됐으며 기계식시계는 11세기에 처음 선보였다.
손목에 차는 기계식시계는 16세기에 와서야 등장했다. 하지만 나약하고 여성적이라 여겨졌던 손목시계는 남자다움의 상징이었던 회중시계에 밀려 거의 400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지난 4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럭셔리 시계 박람회 '왓치스 앤드 원더스 제네바'에서 새로운 롤렉스 모델을 본 딴 전시물 앞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AFP=연합뉴스]
20세기 초 손목시계를 일약 대세로 만든 이는 독일 출신 영국 사업가 한스 빌스도르프였다. 스위스 레베르크로부터 시계 작동 부품인 무브먼트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별도로 구매한 케이스를 결합해 ‘빌스도르프 앤 데이비스(W&D)’라는 브랜드명으로 팔린 손목시계는 히트를 쳤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에서 반독일 정서가 강해지자 빌스도르프는 회사 이름을 ‘롤렉스 워치 컴퍼니’로 개명했다.
참호전이라 불리는 지루한 전투로 유명한 1차 대전은 손목시계의 대량생산과 상업화에 크게 기여했다. 병사들이 참호 안을 기어 다니면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손목시계 수요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1차대전이 끝날 무렵 손목시계는 이제 반대로 용맹의 상징이 됐다.
롤렉스, 카시오, 세이코, 스와치 등 시계업계의 판도 변화 스토리도 재미있다. 1919년 스위스로 이전한 롤렉스는 정확도와 품질이 많이 개선되기도 했지만 빌스도르프의 천재적 마케팅 실력 덕분에 절제된 호화스러움과 지위, 부를 표현하는 시계라는 이미지가 강해지면서 시계브랜드의 최강자로 부상했다. 도버해협 수영 횡단에 성공한 메르세데스 글리츠, 처음으로 에베레스트산 상공을 비행한 영국 공군, 에베레스트산 첫 등정 탐험가 에드먼드 힐러리 등 유명인을 이용한 대대적인 광고를 펼쳐 대성공의 역사를 창조했다. 극한 스포츠의 대담함과 극도의 정밀성, 극상류층의 고급스러움을 연상시킴으로써 황금왕관의 롤렉스는 ‘추구미’를 표현하는 시계의 대표주자가 됐다.
회전하는 소리굽쇠 대신 수정을 사용하는 쿼츠시계와 디지털시계, 나아가 스마트워치 등장으로 시계업계는 대변동을 겪었다. 이젠 시계제작이 장인의 손에서 기계로 넘어갔으며 고장 나면 버리고 새로 사는 시대가 됐다. 장인들에겐 정말 뼈아픈 순간이다.

지난 4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럭셔리 시계 박람회 '왓치스 앤드 원더스 제네바'의 예거 르쿨트르 부스에서 시계제작자가 127년 된 시계를 복원하고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하지만 전자책 e북이 나와도 종이책이 건재한 것처럼 빈티지 시계 가격은 최근 들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고 그 시계의 복원작업도 가치 있게 여겨지고 있다. 나노초의 오차를 다투는 시계 세상에서도 전통 아날로그 시계는 기죽지 않고 오히려 입지를 넓혀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노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시계의 장인인 지은이는 1초당 똑딱거리는 박동 수가 현대 기계식 시계의 반밖에 되지 않는 옛날 전통적 시계와 느림의 미학을 사랑한다고 한다. 클래식 제품이든 초현대식 명품이든 시계를 사랑하는 독자들은 한 번쯤 이 책에 푹 빠져서 똑딱거리는 시계에 맞춰 열독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것이다.
이 책 말미에는 지난 500년 동안 만들어진 골동품 시계를 수리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필자가 안내하는 시계 고치는 법이 붙어 있다. 시계 전문가와 애호가 팬들에게는 눈길이 가는 보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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