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폭탄테러 피한 그 외교관, 강남 지하서 '반죽의 제왕'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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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목 ‘기리야마’ 대표의 새로운 도전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넘버원 상권인 강남역 인근에서 14년째 승승장구하는 우동집이 있다. ‘기리야마 본진’이다. 사람들은 ‘목이 좋으니까 살아남았겠지’ 하겠지만 그래서 더 경쟁이 심하고 비용부담도 크다. 기리야마 본진이 2012년 오픈했을 때 반경 100m 안에 있던 외식업체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집은 10%도 안 된다. “멋모르고 돈 셀 날만 상상하며” 덜컥 계약해버린 식당 크기는 90석. 하지만 쉽게 알아채기 어려운 지하 1층에 있다. “지금까지 버틴 게 기적이죠.(웃음) 오기가 됐든 열정이 됐든 포기할 순 없었어요.”
폭탄 테러 간발 차이로 피한 뒤 인생 바꿔

고소하고 진한 소고기 육수에 매끄러운 면발이 특징인 ‘소울 국수’의 대표 메뉴 곰국수. 신상목 대표가 세계에 내놓을 K누들을 꿈꾸며 반죽부터 육수까지 직접 개발한 것이다. [사진 소울 국수]
고작 10년 남짓한, 노포 축에도 끼지 못하는 우동집 사연에 관심이 가는 건 신상목(54) 대표의 독특한 이력 때문이다. 연세대 법대 89학번인 신 대표는 외무고시에 합격한 후 우동집을 차리기 전까지 16년간 외교관을 지냈다. 손에 물 한 번 안 묻히고 볼펜 자루 쥐기에만 익숙했을 엘리트 범생이가 돌연 우동집을 낸 결정적 계기는 2008년 9월 파키스탄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이다. 당시 주파키스탄 대사관에 근무했던 그는 가족과 함께 가려고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메리어트 호텔의 일식당을 예약했다. 예약시간은 오후 6시. 하지만 좀 늦게 출발했고, 6시10분 호텔에서 폭탄이 터졌다. 50여 명이 죽고 250여 명이 다쳤다. 사망자 명단을 확인하면서 자신의 이름이 어른거리는 환상은 당연했다.
“내일 일도 모르는데…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자” 결심했고, 그 길로 2000년 일본 연수 시절 단골이었던 일본의 ‘기리야마’ 우동집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3대째 100여년에 걸쳐 운영하는 이곳의 변치 않는 ‘기다림의 미학’을 서울에 소개하고 싶다고. 그렇게 신 대표는 기리야마의 우동 비법을 전수받고 강남역 인근에 ‘기리야마 본진’을 오픈했다.
넥타이 풀고, 럭셔리 수트도 벗어버리고 아침마다 직접 밀가루를 반죽해 우동 면 뽑는 일에 몰두했던 그가 최근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올해 3월 기리야마 본진 인근에 국수집 ‘소울 국수’을 오픈한 것. 대표메뉴는 소고기 곰국에 자가제면 생면을 말아먹는 ‘곰국수’와 ‘국밥’, 그리고 ‘우삼겹비빔국수’다. “곰국에 밥 말아먹으면 국밥이 되고, 차가운 면은 비빔국수로 먹는 거죠.”
소면보다 굵고 짜장면보다 얇은 ‘1.4㎜ 마법’

폼나는 외교관에서 자가제면 우동집 ‘기리야마’를 차리고 15년째 묵묵히 반죽과 씨름 중인 신상목 대표. 최기웅 기자
일본식 우동집 사장이 한국 국수에 승부수를 띄운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명색이 한국 외교관이었는데 일본 것을 가져와 한국에 소개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 찼죠. 내가 배운 기술을 갖고 한국의 것을 더 잘 발전시켜서 일본에 소개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로 나가고 싶습니다.”
신 대표의 목표는 한국 국수, ‘K누들’의 세계화다. 인천공항에서 꼬박 23시간을 날아가야 도착하는 아프리카 케냐공화국에도 한식당이 있을 만큼 전 세계인의 K푸드에 대한 관심도는 높다. BBQ부터 사찰음식까지, 외국인의 시선을 사로잡은 한식 종류도 다양한데 유독 ‘국수’에 대한 호기심과 호감도는 적다. 북미와 유럽에서 ‘매운맛’으로 사랑받는 불닭볶음면도 따지고 들면 일본이 원조인 라면이다.
“세계적으로 면 요리는 다양합니다. 그만큼 전 세계인이 즐겨먹는 음식인데 지금처럼 K푸드가 약진할 때 한국 국수의 활약이 저조한 게 너무 아쉬워요. 면(麪)이라는 한자어 대신 ‘국수’라는 예쁜 우리말도 갖고 있으면서. 이건 전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일본 라면도 못하는 일이에요.”
뉴욕에서 미쉐린 가이드 3스타를 받은 ‘정식’의 임정식 셰프를 비롯해 몇몇 유명 셰프들이 한국의 국수를 띄우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녹록지 않았다. “그분들은 요리사지 면 만드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분들보다 밀가루 반죽만큼은 제가 나을 걸요. 우동이나 국수나 기술의 원천은 밀가루 반죽이에요. 반죽만 잘할 수 있으면 국수부터 피자까지 응용 폭이 굉장히 넓어지죠.”
누가 봐도 한국적인 정체성이 있고, 전 세계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면 요리를 개발하고 싶은 신 대표가 고심 끝에 만들어낸 소울 국수의 면은 ‘낯선 익숙함’이 특징이다. 국물에 말아먹지만 잔치국수용 소면이나 넓적한 칼국수와는 다르다. 입안에 후루룩 넣으면 매끄럽게 춤추다 진한 고소함을 남기고 스르륵 목 뒤로 넘어간다.
“소면보다 약간 굵고 짜장면보다 약간 얇죠. 우리는 ‘1.4㎜의 마법’이라고 부르는데, 면 두께의 진짜 중요한 목적은 함께하는 소스나 국물과의 궁합이에요. 한국적인 국수라고 하면, 소고기 육수가 최고라고 판단했죠. 중국도 일본도 돼지나 닭고기를 우린 국물이 주이지 우리 설렁탕·곰탕처럼 소고기와 소뼈를 활용한 국물은 없거든요. 그래서 한국 국수의 정체성을 소고기 육수와 그 육수에 가장 잘 어울리는 두께의 면으로 설계했죠.”
소울 국수는 신 대표가 밀가루와 씨름하면서 엘리트답게 반죽의 정도, 저작감, 삶는 시간, 목넘김 등을 실험하며 꾸준히 채집한 데이터와 노하우의 결과물이다. “밀가루는 한 마디로 과학이에요. 침대보다 더 심오한.(웃음) 다루는 사람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딱 요물이거든요. 계절 별로 물과 섞이는 과정도 예민하지만, 기본적으로 밀가루는 인간이 소화하기 힘든 곡물이에요. ‘밀가루 음식만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다’는 말을 하게 되는 이유죠. 그래서 밀가루 반죽의 우선 과제는 소화가 잘 되는 상태를 만드는 거죠.”
‘마지막 반지를 차지하는 자, 모든 힘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 홍보 문구를 인용하면, 폼 나는 외교관에서 우동집 사장으로 변신한 신상목 대표의 꿈은 ‘반죽의 제왕’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 수준 높고 맛도 좋은 ‘K누들’을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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