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런 무대가 가능하다니"…객석 술렁이게 한 채시라 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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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스테이지] 정구호 연출, 국립정동극장 연희극 ‘단심’
“외국인들이 엄청 좋아하겠는데?”“심청으로 이런 무대가 가능할 줄 몰랐네.”
지난 11일 오후, 국립정동극장에서 공연된 연희극 ‘단심’(8일~6월 28일까지) 커튼콜이 끝나고 불이 켜지자 객석이 술렁였다. 관계자들이 점잖게 보고 가는 여느 전통예술 공연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340석 아담한 중극장이지만, 주말 오후 객석을 빈틈없이 채운 일반 관객들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심청이야기를 춤으로 푼 무대에 75분간 숨죽이고 집중하는 건 분명 낯선 풍경이었다.
전통예술 분야서 드물게 50회 장기공연

2막에 펼쳐지는 핑크빛 용궁 판타지. 부채춤을 활용한 현대적인 안무다. [사진 국립정동극장]
‘단심’은 연희극을 표방했지만 서울시무용단 대표 레퍼토리 ‘일무’로 뉴욕 링컨센터 공연까지 전석매진시켰던 정구호 연출·정혜진 안무 콤비가 다시 뭉쳐 만든 무용극에 가깝다. 국립정동극장 30주년 기념작으로 제작되면서 전통예술 공연으로서는 드물게 ‘50회 공연’을 선언해 그 성공 여부에 공연계의 관심도 쏠렸다.
패션 디자이너 출신 전방위 비주얼 디렉터 정구호는 2013년 국립무용단 ‘단’으로 처음 한국무용 연출에 데뷔한 이래 ‘묵향’ ‘향연’ ‘산조’ ‘일무’에 이르기까지 전통과 현대를 절묘하게 절충한 미니멀리즘으로 한국춤의 패러다임을 ‘추상’으로 바꾸며 오늘의 한국무용 르네상스에 앞장선 흥행사다. ‘단심’이 흥미로운 건 ‘감정없는 한국무용’을 개척한 그가 심청의 감정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효심 이면의 인간적 갈등을 소재 삼았다. ‘단심(單沈)’이란 제목부터 심청의 내면을 가리키는데, ‘감정있는 한국무용’도 정구호를 거치면 과연 모던할 수 있을까.

1막은 무대 전체를 검푸른 바다로 매핑해 ‘범피중류’ 장면을 연출한다. [사진 국립정동극장]
정구호는 국립무용단에서 춘향을 소재 삼아 ‘모던클래식 무용극’을 표방한 ‘춘상’(2017)을 선보인 적 있었다. 최신가요에 헤드뱅잉, 탭댄스까지 동원한 현대적인 무대가 춘향의 정서와 거리감이 있었다. ‘단심’은 전통적 정서를 살리면서도 핵심만 추출한 정구호식 미니멀리즘이 살아있다. 장황한 서사를 거두절미하고 심청의 감정이 요동치는 ‘범피중류’(심청이 인당수에 뛰어들기 직전의 판소리 눈대목) 장면으로 순식간에 객석을 사로잡는다. 배경 변화가 많은 무대는 단청을 모티브 삼은 시노그래피가 씬스틸러가 된다.
연희단체라는 정동극장 예술단의 정체성에 걸맞게 판소리 심청가의 아니리를 활용한 내레이션도 특징적이다. 각 막의 시작에 특유의 리듬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아니리로 한국적인 분위기를 띄우면서 영어 자막은 무대에 흐르게 했다. 본격적인 소리는 무용으로 구현하는 셈인데, 세 차례 막이 열릴 때마다 바닥의 연꽃 문양 속에 잠들어 있는 심청은 안데르센 동화의 엄지공주처럼 친근한 이미지로 보편성을 얻는다.
10월 경주 APEC 연계 특별공연도 예정

용궁여왕 역의 채시라. [사진 국립정동극장]
바다와 용궁, 궁궐로 구분되는 1·2·3막은 결이 확 다르다. 1막에선 박다울의 거문고 산조가 심청의 고독한 심정을 그리면서 분열된 자아 ‘검은 심청’을 등장시킨다. 두 심청의 2인무는 마치 싱크로나이즈 스위밍을 하듯 거울 동작을 하다 점차 어긋나고, 심봉사와 뺑덕이 가세해 갈등의 4인무를 춘다. 칼군무도 있다. 발레 ‘심청’을 연상시키는 선원들의 역동적인 남자춤과 함께 몰입형 미디어아트처럼 검푸른 바다로 전체를 매핑한 무대에 조각배 한 척이 내려오며 ‘범피중류’가 완성된다.
암담한 현실이 걷히고 2막은 핑크빛 ‘용궁 판타지’다. 가야금 선율과 건반, 현악기의 오케스트레이션이 공간을 꽉 채우며 지금껏 본 적 없는 ‘핫핑크’의 향연이 펼쳐진다. 핑크빛 물결로 뒤덮인 용궁에서 무용수들의 의상과 소품도 핑크 일색이다. ‘용궁여왕’을 맡은 배우 채시라의 무용수 데뷔도 관전포인트. 용왕을 여왕으로 설정해 어머니를 가져본 적 없는 심청을 위한 ‘모성’이라는 감동코드를 더한 것. 드라마 ‘최승희’ ‘해신’ 등에서 춤실력을 선보였던 채시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절도있는 춤선으로 군무의 파도를 넘는다. 대중스타의 존재감을 활용해 전 세계에 통하는 보편적 모성 코드를 극대화한 연출이다. 모녀가 마침내 부둥켜 안으면 별빛이 쏟아지는 우주가 열리며 심청이 물위로 떠오르는 미장센에 감동이 있다.
3막은 궁중음악 정수인 수제천까지 동원되는 버라이어티한 축제의 장이다. 단청과 책가도의 모던한 문양이 무대를 수놓고, 소경들을 위한 잔치와 부녀상봉, 심봉사의 개안과 화려한 결혼식까지 이어진다. 뺑덕이 유머러스한 안무로 객석에 박수장단을 유도하며 즐거운 한마당을 연출하고, 춤판의 연장선인 커튼콜까지 볼거리가 계속된다.
국립정동극장은 과거 관광객 대상 상설공연을 하던 시절을 포함, 꾸준히 전통 기반의 창작을 해왔지만 예술적 성취가 아쉬웠던 게 사실이다. ‘단심’에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다 잡겠다는 포부가 읽힌다.
정성숙 정동극장 대표는 “국공립 단체의 전통공연이 3~5회를 넘는 법이 없지만, 전통공연도 대중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50회 공연에 나섰다”면서 “외국인과 대중을 쉽게 이해시키면서도 수제천 등을 활용해 전통의 예술성까지 살려 글로벌 무대로 도약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아직 초반이긴 하나 50회 대장정은 매진을 이어가며 순항중이고, 이미 10월 경주 APEC 연계 특별공연도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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