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잘 연기하다 갑자기 “대본이 엉성”…이 작품명은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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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유령’에서 무연고자로 죽은 이들의 영혼이 자신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 고선웅 연출은 “무연고자 이슈를 다룬 기획 기사를 읽고 연극을 만들게 됐다”고 밝혔다. [뉴시스]
“세상은 무대, 사람은 배우. 가끔가다 유령도 있구나. 생긴 것은 사라지고 모인 것은 흩어지나니. 제아무리 후진 역할도, 제아무리 못난 역할도 결국은 다 퇴장이구나.”
시신 안치실을 떠돌던 유령들이 마침내 하늘로 올라가며 외친다. 이들은 혼자서 생을 쓸쓸히 마감한 무연고자다.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와 가명을 쓰며 살던 중년의 여성,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법원에서 정해준 성씨로 살다 38세에 객사한 고아 출신 노숙자…어떤 사람이라도 “결국은 다 퇴장”이라는 마지막 대사와 함께 연극은 막을 내린다.
‘유령’은 서울시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인 고선웅이 ‘늙어가는 기술’ 이후 14년 만에 발표한 순수 창작극이다. 극은 주인공 배명순이 남편의 폭력을 피해 가출하며 시작된다. 배명순은 남편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정순임이란 가명을 쓰며 일용직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간다. 사장이 임금을 체불해도 진짜 신분이 들통날까 두려워 경찰 신고도 하지 못하던 배씨는 찜질방에서 홀로 죽음을 맞는다.
극은 현실과 무대를 넘나든다. 무대에 선 배우들은 극 중 캐릭터와 배우인 자신을 계속해서 오간다. 배명순을 연기하는 배우 이지하가 임금을 떼먹으려는 음식점 사장에게 항의하다 돌연 “대본이 엉성하다”며 배우 이지하로 돌아오는 식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배우들의 대사에 “10년 만에 연극하는데”(이지하), “168번째 맡은 역할”(신현종) 등 실제 상황이 반영돼 있어 연극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대목도 있다.
배우들이 작품 속 캐릭터와 배우로서의 자신을 오가는 설정은 “인생은 연극”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장치다. 분장이 지워지면 캐릭터는 사라지고 배우는 그 자신으로 돌아오듯, “무연고자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란 무대에서 하나의 역할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고선웅 연출은 지난달 3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프레스콜에서 밝혔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세상에서,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끝이 없잖아요. 반대로 ‘내가 이 역할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상상해봤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그렇게 연극처럼 살다 가는 게 아닐까요.”
배우들 역시 “대본을 분석하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두라”는 제언을 고 연출에게 받았다고 한다. 극 중 무대 감독 역할을 맡은 배우 이승우는 “관객들이 무대를 보며 연기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게 뭐지?’하는 느낌을 받길 원한다는 게 고 연출의 설명이었다”며 “연기 연습이나 분석을 오히려 자제해야 하는 특이한 연극”이라고 설명했다. 유령1을 연기하는 배우 신현종은 “신현종이든 유령이든 ‘재밌게 연극을 하며 놀자’는 생각”으로 무대에 선다고 했다.
그렇다고 극이 마냥 가벼운 분위기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화장이 시작된 후 세 유령이 자신의 시신에 작별을 고하는 장면이 특히 먹먹하다. 자신의 얼굴을 본 따 만든 시신 모형을 바라보며 유령들이 나지막이 독백을 내뱉는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공연은 2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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