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더버터] 교실에서 시작되는 공공외교, 언어로 문화를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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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영국문화원의 공공외교

서울 종로구에 있는 주한영국문화원은 1970년대 유학을 준비하거나 영어 공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찾는 공간이었다. 당시만 해도 낯선 나라 영국의 문화를 느끼고, 어학 자료를 빌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 한국에서 영국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는 창구였다.
50년이 지난 지금, 단순한 교육기관이나 문화센터를 넘어 하나의 ‘공공외교(public diplomacy)’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공공외교는 국가정상이나 장관급 회담으로 이뤄지는 공식외교와 달리 공공과 민간이 협력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사실상 문화외교에 가깝다. 주한영국문화원은 언어와 교육, 문화라는 수단으로 한국과 영국을 잇는 역할을 한다. 대사관과 별개로 외교활동의 거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외교관 없이 외교활동을 수행하는 공공외교의 중심에는 교육과 문화가 있다.
교실 안의 언어 외교
학부모 사이에서 주한영국문화원은 이른바 ‘영어 학원’으로 유명하다. 검증된 원어민 교사를 만날 수 있다는 강점으로 알려졌지만, 교육 프로그램 바탕에는 ‘문화 간 이해’와 ‘스스로 배우는 법’을 함께 교육하는 철학이 담겨 있다. 닐 로버츠 영국문화원 아태지역 영러너 콘텐츠 리드는 “언어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라며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하는 방법을 배우고 언어를 실생활에서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교육 철학을 이해하려면 영국문화원의 90년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1934년 영국 정부의 공공외교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교류 기관이다. 당시 유럽 내에 팽배하던 극단주의에 대응하는 수단으로 문화교류를 선택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개방적 소통과 문화 간 지식 공유에 주력했고, 최근에는 디지털학습을 비롯한 청년역량강화, 예술교류, 세계시민교육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하고 있다. 임혜숙 영국문화원 한·일영어교육사업총괄은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90년간 교류해 오면서 예술과 문화 파트너십, 교육, 영어 교육 등 모든 활동의 중심에 개방성, 존중, 상호이해라는 핵심 가치를 일관되게 지켜왔다”며 “교육 프로그램이 단순히 언어를 가르치는 것을 넘어 영국 문화를 이해하고 글로벌 감각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이유”라고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킨더플러스(Kinder Plus)’ 프로그램이다. 유아들을 대상으로 감정 표현, 신체 활동 등을 결합해 언어와 감성 발달을 동시에 교육한다. 초등 과정인 ‘프라이머리플러스(Primary Plus)’는 환경, 디지털 윤리, 협력 등 주제를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 기반 수업이다. 아이들이 시험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실생활에서 활용하는 소통의 도구로 영어를 배우도록 기획됐다. 특히 한국에서는 해외 체류 후 귀국한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리터니(Returnees)’는 다문화 배경을 자연스럽게 존중하고 창의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정규 수업 외에도 학습자들이 영국 문화를 체험하고 국제적 감각을 키울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이 마련된다. 영국문화원 독서 권장 프로그램 ‘리딩 챌린지(Reading Challenge)’, 어린이 그림대회 ‘아트 컴피티션(Art Competition)’, ‘커넥팅 컬쳐스(Connecting Cultures)’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은 다른 나라의 또래와 편지를 주고받고, 그림을 그리고,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글로벌 시민으로서의 소양을 쌓는다. 로버츠 리드는 “한국의 학부모들은 배움이 가시적인 성과로 드러나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지만, 언어를 통해 ‘무엇을 이해하고 연결할 수 있는가’라는 점도 동시에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학습은 반드시 의미 있는 경험이어야 하는데, 직장인들은 계약을 협상하거나 프로젝트를 발표할 수 있는 실용 영어, 대학생은 에세이에 도움이 되는 학문적 영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아기에는 놀이와 호기심을 통해 세상을 탐색하며 배우는 것이 중요해요. 어린 학습자들은 말을 하기 전에 ‘침묵기(silent period)’를 거칠 수 있는데, 이때 언어를 충분히 흡수할 시간을 주면 이후 눈에 띄게 도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단기적인 성과보다 아이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믿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서울 중구에 있는 주한영국문화원 영러너 어학원. [사진 주한영국문화원]
문화로 잇는 외교
또 하나의 공공외교 축은 문화예술이다. 주한영국문화원은 매년 전국 곳곳에서 문화행사와 예술교류 프로그램이 열어 시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영국과 연결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연극 상영, 현대미술 전시, 디지털 아트 창작 캠프, 다큐멘터리 전시, 환경과 젠더를 주제로 한 시민 워크숍까지 다양하다.
예술을 통해 메시지를 던지고 공감대를 형성해 문화로 소통하는 전략이다. 전국 단위의 문화 네트워크를 확장하기 위해 지역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지난해 2월에는 충북 충주와 제주 서귀포를 잇는 ‘한영 문화도시 교류 세미나’를 개최했다. 행사에는 브래드포드·리즈·헐 등 영국의 문화도시 기획자들을 초청해 시민들과 함께 문화도시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전략을 논의했다. 영국문화원은 “전 국민이 문화예술을 격차 없이 누리고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어학원을 통한 공공 부문과의 협력도 강화했다. 특히 올해는 ‘책읽는 서울광장’ 개장에 맞춰 특별 프로그램 기획으로 시민들이 도심 속에서 책과 영어, 문화를 함께 즐기는 기회를 마련했다. 또 서초구립내곡도서관과 어린이 영어 프로그램 ‘Hello, Britain’을 열어 영어 그림책과 만들기 활동을 통해 영국의 언어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험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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