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프랑스가 핵무기 공동 개발에 사상 처음으로 합의했다. 이번 합의를 두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핵무력 사용을 거론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유럽의 안보에서 발을 빼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시점에 이뤄진 중대한 안보협력 강화 조치"라는 평가가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영국을 국빈 방문 중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9일(현지시간) 양국의 핵무기 공동 개발 조율에 합의했다. 영국 정부는 "이번 합의는 양국 각각의 (핵) 억지력이 사상 처음으로 독립적이면서도 조율될 수 있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프랑스 엘리제궁 관계자도 이번 합의가 두 핵보유국 간의 연대라면서 "우리의 동맹과 적대 세력 모두에 대한 메시지"라고 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오른쪽)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왼쪽)가 2025년 7월 9일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이번 발표는 유럽 국가들이 최근 들어 "영국과 프랑스의 핵우산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문하던 차에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차원의 집단방위에서 발을 빼려는 분위기 속에 유럽에선 안보 불안이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NYT)는 "미국의 변덕과 러시아의 호전성 때문에 유럽이 똘똘 뭉치고 있다"고 전했다.

나토 당국자 출신인 까미유 그랑 유럽외교관계위원회 명예 정책 연구위원은 FT에 "이번 합의는 양국의 핵 정책에 있어 의미 있는 변화"라면서 "유럽 안보에 대한 영국·프랑스의 공약을 보여주는 매우 강력한 선언"이라고 말했다.

당초 영국은 나토의 핵기획그룹(NPG) 회원국으로서 나토 안보를 위해 보유 전력을 공유했었다. 반면 나토 핵공유 협정에서 빠져 있는 프랑스는 핵무기 사용과 관련해 독립적인 결정을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8일 영국 런던에서 영국을 국빈 방문하는 동안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와 만나 회담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실제로 그간 마크롱 대통령도 핵무기 사용 기준이 되는 프랑스의 핵심 이익에 '유럽적 차원'이 있다면서도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으며 핵 억지의 핵심인 모호성을 유지해왔다. 그랬던 마크롱 대통령이 이번에 구체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다. 지난 8일 그는 영국 의회 연설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의 안보에 대해 특별한 책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또 "유럽에서는 우리 양국이 유럽 안보에 특별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기대가 있다"며 "지금은 이를 명확히 밝힐 때"라고 강조했다.

이를 두고 로런스 프리드먼 킹스칼리지런던 명예교수는 FT에 "내가 아는 한 프랑스는 핵전력을 누군가와 조율한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매우 중요한 진전"이라고 했다.

양국은 차세대 장거리미사일 공동개발 등에 나서는 '랭커스터 하우스 2.0 선언'에도 서명할 예정이다. 2010년 양국이 합의한 랭커스터 하우스 방위협정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셈이다.

이번 2.0 선언에는 ▶우크라이나 전장에 동원된 공대지 순항미사일인 영국의 스톰섀도와 프랑스의 스칼프를 대체하기 위한 차세대 장거리 미사일 개발 ▶차세대 공대공미사일, 드론(무인기)·미사일 격추용 극초단파 무기 개발 ▶동시타격 역량 향상을 위한 인공지능(AI) 활용 등이 포함됐다. 양국 정상은 이날 영불해협을 통한 불법 이민 차단에도 큰 틀에서 합의했으며, 10일 공식 정상회담에서 구체적 방안 등을 다룰 예정이다.

9일 영국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에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왼쪽 두 번째)와 부인 빅토리아 스타머(왼쪽 첫 번째)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과 부인 브리짓 마크롱 부인을 영접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