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보테가 베네타, ‘엮음’의 언어로 문화를 직조하다 [더 하이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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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좋은 가죽을 자른 긴 끈을 교차하며 엮는다. 끈과 끈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격자무늬는 하나의 문양인 동시에 견고함과 부드러움의 성질을 직조한다.
이는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인트레치아토(Intrecciato)’ 이야기다. 올해 인트레치아토가 탄생한 50주년을 기념, 보테가 베네타는 지난 6월 21~22일 서울 통의동 아름지기 재단에서 ‘세계를 엮다: 인트레치아토의 언어’ 전을 열었다. ‘엮임(Weaving)’이라는 개념 아래 모인 한국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이곳에 모였고, 브랜드가 추구해온 장인정신과 예술적 상상력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지난 6월 21~22일 서울 통의동 아름지기 재단에서 열린 보테가 베네타의 전시 '세계를 엮다 : 인트레치아토의 언어'. 건물 외벽에 걸려있는 작품은 로프를 엮어 만든 이광호 작가의 작품이다. 사진 보테가 베네타
문화적 언어로 확장된 인트레치아토
1975년 보테가 베네타가 처음 선보인 인트레치아토는 얇게 자른 긴 가죽끈 ‘페투체(Fettucce)’를 가죽 모형이나 나무 몰드를 따라 손으로 엮어 완성한다. 이탈리아의 전통 직조 기술과 브랜드의 뿌리인 베네토 지역의 가죽 세공 전문성이 만나 탄생시킨 가죽 수공예다. 특히 보테가 베네타는 전통적인 직각 형태의 위빙 방식에서 벗어나, 45도 기울기의 대각선으로 교차각을 만들었는데 이는 인트레치아토를 더욱 유연하게 만드는 동시에 독특한 미감을 완성한다.
이를 통해 당시 주류였던 딱딱하고 구조화된 핸드백과 달리, 인트레치아토를 사용한 가방은 천처럼 흐르는 유연한 촉감을 지닌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당신의 이름만으로 충분합니다(When your own initials are enough)’를 브랜드 철학으로, 로고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노 로고 브랜드(No Logo Brand)’의 방향성은 1980년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서 로렌 허튼이 이 클러치백을 들며 더욱 유명해졌다. 이후 인트레치아토는 단순한 가죽 기법을 넘어 ‘보이는 정체성’이자 브랜드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오늘날엔 수공예와 창의성이라는 유무형의 연결로도 확장됐다. 여기에 오랜 작업으로만 탄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들인 시간, 정체성의 은유로도 해석된다.
이번 전시는 오랜 시간 예술·문화계를 후원해온 보테가 베네타가 이런 안트레이치아토의 정신을 예술적으로 풀어낸 프로젝트다. 참고로 보테가 베네타는 2021년 ‘보테가 포 보테가스(Bottega for Bottegas)’ 프로젝트를 시작해 지금까지 세계 각지의 전통 공방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베네치아 댄스 비엔날레 프로젝트, 뉴욕 더 스트랜드(The Strand) 서점과 아스펜 아트 뮤지엄 등과의 협업 프로젝트 등을 진행하며 예술과의 만남을 시도했다. 올해는 손의 제스처를 주제로 한 글로벌 캠페인 ‘수공예는 우리의 언어(Craft is our Language)’를 통해 수공예를 문화적 언어로 재해석했다.

전시에선 '손의 제스처'를 주제로 한 보테가 베네타의 글로벌 캠페인 '수공예는 우리의 언어(Craft is our Language)'의 사진이 함께 전시됐다. 사진 보테가 베네타
작가가 직조한 엮음의 조형 언어
이번 전시는 ‘엮는다’는 행위를 중심으로 9팀의 작가와 장인이 참여해, 인트레치아토의 조형성과 철학을 각자의 매체로 해석했다. 아름지기 1층과 2층에선 조각·도자·유리·설치·직물 등 다양한 장르에서 형태·시간·기억을 직조하는 예술적 시도가 펼쳐졌다.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은 것은 이광호 작가의 외벽 파사드 작품. 매듭을 모티브이자 작업 방식으로 택해온 이 작가는 아름지기 외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한 로프 매듭 설치작을 통해 엮음의 세계로 관람객을 인도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전시장 2층에선 관람객이 함께 만들어가는 참여형 구조물을 마련하며 감각과 재료, 시간이 엮이는 과정을 선보였다. “사물은 시간을 담고 있다”는 그의 철학 아래 현장은 감각적 기억의 장으로 작동했다. 작품은 가죽끈과 동파이프, 폼 등 다양한 재료가 엮이며 참여자들의 손을 통해 계속해서 모습이 변하며 완성됐다.

이광호 작가가 이번 전시를 위해 작업한 작품 '옵세션 시리즈'. 사진 보테가 베네타

전시장 2층에 마련된 이광호 작가의 참여형 작품, 폼, 동파이프 등으로 구조를 잡은 조형물에 전시 기간 동안 관람객이 가죽끈을 엮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사진 보테가 베네타

'세계를 엮다 : 인트레치아토의 언어' 전의 전시장 모습. 엮임의 철학을 보여주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선보였다. 맨 왼쪽부터 '둥근 유랑(xxxx-xxxx)' 등 고 강서경 작가의 작품들과 정명택 작가의 'Creating a Void(2025)', 홍영인 작가의 'Woven and Echoed(2021)', 이헌정 작가의 'Island(2021)', 이광호 작가의 'Obsession(2025)'. 사진 보테가 베네타

점토와 종이 타월을 적층해 탄생한 박종진 작가의 ‘예술적 지층’ 시리즈. 사진 보테가 베네타
특히 이번 전시에선 지난 4월 작고한 강서경 작가의 작품을 다시 한번 마주할 수 있었다. 전통과 동시대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탐구하는 우리나라 대표 중견 작가였던 그답게 이번에도 격자 구조를 중심으로 사회 구조 속 개인의 존재를 성찰했다. 전통 화문석, 철, 실, 가죽 등으로 구성된 설치 작품은 물리적 공간과 상징적 위치의 경계를 시각화해 보여주는 작업이다. 보테가 베네타는 리움미술관 개인전 후원으로 맺은 강 작가와의 인연을 이어, 인트레치아토 정신이 담긴 그의 작품을 이번 전시에서도 선보였다.
세라믹 아티스트 박종진 작가는 점토와 종이 타월을 적층해 형성한 ‘예술적 지층’ 시리즈를 선보였다. 직조된 것 같은 조형물은 반복과 축적의 미학을 표현했다. 정명택 작가의 목조 오브제는 비움과 존재, 형태와 여백의 균형을 통해 직조를 은유적으로 형상화했다. 또 이헌정 작가의 도자 가구, 이규홍 작가의 유리 스크린은 각각의 물성과 빛을 통해 ‘엮음’의 감각을 확장했다.
홍영인 작가의 ‘Woven and Echoed’는 1970~80년대 섬유공장에서 일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태피스트리(Tapestry, 색실을 엮어 그림을 표현하는 직물 공예)로 엮은 작업이다. 반복된 노동과 잊힌 기억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직조를 저항과 복원의 언어로 전환했다. 박성림 작가는 면사 매듭 구조를 통해, 매듭의 점과 선, 공간 구조의 형성을 시적으로 직조했다. 마지막으로 온지음집공방은 대나무 발 국가무형문화재 조대용 장인, 매듭 공예 전수자 박진영 작가, 금속 공예 전수자 박병용 장인과 협업해 취렴(翠簾, 푸른 대오리로 엮어 만든 발)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전통 공예의 가치를 현대적 감각으로 연결했다.
한편 한국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보테가 베네타 아틀리에 장인들이 사용 후 남은 가죽 조각을 엮어 만든 ‘브릭-아-브락(Bric-a-Brac)’ 5개의 작품도 함께 전시돼 한국 예술과 브랜드를 연결했다. 버려질 뻔한 가죽 조각들은 ‘가방’이란 주제 안에서 다채로운 색상과 다양한 질감 그리고 형태가 어우러지며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이들의 지속 가능성과 예술에 대한 철학과 노력을 볼 수 있는 증거였다.

보테가 베네타 아틀리에 장인들이 사용 후 남은 가죽 조각을 엮어 만든 ‘브릭-아-브락(Bric-a-Brac)’ 작품들. 사진 보테가 베네타
브랜드와 예술의 긴밀한 공진화
이번 전시는 인트레치아토라는 한 럭셔리 브랜드의 상징이 어떻게 문화적 언어로 진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참여 작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엮기의 개념을 물리적·상징적·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했고, 보테가 베네타는 이를 통해 예술 생태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녹여냈다.
로고가 없는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는 직조를 통해 자신을 말해왔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 철학은 더욱 명확해졌다. 인트레치아토는 단순한 가죽 세공 기법이 아니다. 연결과 교류, 기억과 시간의 구조적 은유다. 브랜드는 이를 감각적 제품뿐 아니라, 문화적 제스처, 예술적 실천으로 확장하며 그 존재감을 넓혀간다. ‘수공예는 우리의 언어(Craft is our Language)’라는 캠페인 슬로건처럼, 이번 전시는 손·직조·시간·감각을 하나의 언어로 엮는 시도였다. 장인과 예술가, 브랜드와 관람객이 함께 엮이는 공간과 시간. 이번 전시는 보테가 베네타가 앞으로 어떤 문화적 실천을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자 예고편이었다.
“인트레치아토는 단순한 매듭 아닌 시간을 엮는 태도“

'세계를 엮다 : 인트레치아토의 언어' 전에서 보테가 베네타와 협업해 새로운 옵세션 연작을 선보인 이광호 작가. 사진 본인 제공
이광호 작가는 전선, 나일론 로프, 동파이프 등 다양한 재료를 엮어 조각과 가구, 설치 작업을 선보여온 한국의 대표적인 조형예술가다. 손의 감각과 촉각적 실험을 중심에 둔 그의 매듭 작업은 오브제의 실용성과 예술성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이번에는 보테가 베네타와 함께 전시 ‘세계를 엮다: 인트레치아토의 언어’에 참여해, 엮기의 미학을 공유하는 대형 설치 작품과 관람객이 함께 엮는 체험형 신작을 선보였다.
-건물 외벽에 설치된 신작 ‘옵세션 시리즈(Obsession Series)’로 엮음·엮기에 대한 전시의 시작을 열었다. 이번 작품은 협업은 전시를 위해 새로 작업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협업이 어떻게 이루어졌나.
“처음엔 아름지기 외벽에 작은 설치물을 붙이는 것으로 제안이 왔다. 그런데 그보다 더 생동감 있는 형태, 살아 있는 구조물이 벽에서 안으로 이어지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보테가 베네타와 논의하며 아이디어를 확장했고, 브랜드 측에서도 흔쾌히 동의해줬다. 덕분에 전시 주제와도 잘 맞는 방향으로 풀 수 있었다.”
-인트레치아토를 이번 작업에서 어떻게 해석했나.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태도’로 봤다.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변화를 만들고, 시간을 엮어가는 과정 말이다. 나 역시 매듭을 통해 그런 태도를 작품에 담아내려고 하고 있다. 가죽을 하나하나 엮어내는 그 집요함이, 나의 매듭과 닮았다고 느꼈다.”
-작가 이광호의 세계에서 매듭은 어떤 의미인가.
“본능이었다. 어릴 때 농촌에서 자란 기억,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따뜻한 풍경에서 시작됐다. 할아버지가 매듭을 꼬는 모습을 보고 자라며 자연스럽게 손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 매듭은 꼬는 과정은 단순한 행위이지만 쌓이고 쌓이면 형태가 되고, 그 안에 시간이 담기게 된다. 매듭은 결국 나 자신이 되고, 그 자체로 나의 삶이 된다.”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 ‘놋(Knot, 매듭)’ ‘옵세션(Obsession, 강박)’ 시리즈는 어떻게 진화하고 있나.
“처음엔 매듭 꼬기라는 행위에만 집중했다. 단순하지만 빠져드는 반복성이 있었고, 그것이 집착처럼 쌓이면서 ‘옵세션’이란 이름이 붙었다. 전선이나 PVC처럼 실용적인 재료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 재료도 확장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시리즈도 그 연장선이다.”
-이번 전시의 외벽 설치물은 종전 많이 보여줬던 의자·조명 같은 실용적인 조형물 작업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띤다. 무엇을 의도했나.
“가구 작업은 갤러리 등 기획자의 영향도 있었고, 작업 자체도 계획을 잡고 한다. 가구형 작품들이 해외에서 유명해지며 자연스럽게 실용성과 조형성을 함께 가진 작업을 계속하게 됐다. 지금은 형태의 구속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설치 작업은 훨씬 즉흥적이다. 사전 설계도 없이 현장에서 재료와 공간의 대화 속에서 형태를 만들어간다. 감정과 공간의 호흡이 중요한 작업이라 매번 다른 결과가 나온다. 이번에도 외벽에서 안으로 흐르는 형태를 통해 관람객에게 열린 인상을 주고 싶었다.”
-한국 예술계에서 가장 바쁜 작가다. 예정된 작업 또는 전시가 있나.
“내년 3월 개인전이 예정돼 있다. 협업도 아직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많은 제안이 있어 검토 중이다. 난 협업을 좋아한다. 새로운 방식으로 작업이 확장될 수 있어서다. 이번 보테가 베네타와의 작업도 분명 또 다른 연작으로 이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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