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경제체질 바꾼 'IMF의 칼'…성장률 깎아먹은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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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트리거 60' ⑧97년 외환위기, 그후 경제는

1997년 11월 14일 오전 청와대. 강경식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김용태 청와대 비서실장,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이 함께한 자리에서였다. 강 부총리가 말을 꺼냈다. “이젠 국제통화기금(IMF)에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나흘 전, 홍재형 전 경제부총리와 비밀 통화에서 같은 얘기를 들었던 YS는 담담히 말했다. “알겠소. 그대로 추진하시오.”
1주일 뒤인 21일, 한국은 IMF 구제금융을 받겠다고 발표했다. 한국 경제의 운명을 바꾼 날이었다. 12월 3일에는 IMF의 미셸 캉드쉬 총재가 IMF 210억 달러,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100억 달러, 아시아개발은행(ADB) 40억 달러, 미국ㆍ일본을 비롯한 7개국이 준비하는 200억 달러 등 총 550억 달러의 지원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금융 구조조정과 시장 개방,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의 내용을 담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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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3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오른쪽)가 한국 정부와의 구조조정 합의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와 임창열 경제부총리(왼쪽부터)의 표정이 어둡다. [중앙포토]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한국 경제와 금융·산업의 틀을 바꿔놓았다. 수많은 금융투자회사와 기업들이 무너졌지만, 이른바 ‘글로벌 스탠다드’를 도입하면서 살아남은 곳은 훨씬 튼튼해졌다. 기업 부채비율은 뚝 떨어졌고, 은행 건전성은 높아졌으며, 회계와 기업의 지배구조는 투명해졌다. 그래서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금융·산업의 체질을 개선한 계기(트리거)’ 였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IMF 구조조정 협상단도 외환위기를 “위장된 축복”이라고도 했다. 고통스럽지만 사실은 한국 경제에 축복이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정말 그랬을까.

한보 게이트 등 터지며 대기업 줄도산

시계를 조금 앞으로 돌려보자. 97년 들어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연초 한보철강이 부도를 내며 주채권은행인 제일은행이 사실상 지불 불능 상태에 빠졌다. 한보그룹이 정ㆍ관ㆍ금융계에 뇌물을 뿌렸고, 제일은행이 제대로 된 검토 없이 거액을 대출해 준 ‘한보 게이트’의 전모도 드러났다. 이어 삼미ㆍ대농ㆍ진로 그룹이 부도를 냈다. 10조원가량 부채를 안고 있던 기아자동차그룹 마저 쓰러졌다. 정경유착과 기업의 과다 차입, 금융기관의 과잉 대출, 지나치게 많은 단기 외화 채무 등의 문제가 한보철강을 비롯한 일련의 대기업 부도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금융기관의 부실, 자본 유출에 따른 외환보유액 고갈, 그리고 원화가치 급락과 한국의 신용 하락을 초래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외에서도 악재가 몰아닥쳤다. 국제 투기자본들이 동남아 국가에 투자한 자금을 빼며 해당 국가의 통화가치가 폭락했다. 7월 태국이 외환위기를 맞았고 이어 인도네시아 등지로 번졌다. 10월에는 홍콩이 공격을 받아 주가지수가 폭락했다. 한국도 주가와 원화 가치가 급락하며 달러화에 대한 가수요까지 겹쳐 외환보유액이 하루가 다르게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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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외채를 못 갚는 국가 부도 사태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일본 은행들이 한국으로부터 자금을 회수하고 있었으므로 일본 정부에 인출 자제 협조를 구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와중에 일본은 1000억 달러를 출연해 아시아통화기금(Asian Monetary FundㆍAMF)을 만들겠다는 안을 제시했다.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진정시키는 등에 활용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급전이 필요했던 한국은 11월 이후 일본에 두 번 특사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는 “IMF를 통해서만 유동성 위기에 처한 국가를 도와주기로 합의했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AMF까지 만들어 동아시아 경제를 안정시키겠다던 일본이 정작 우리의 직접 요청은 왜 거절했는지, 미국과 중국은 왜 AMF 설립을 반대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단지 ‘국제금융시장을 주도하기 위한 주요국 사이의 견제’라는 등의 추측만 나올 뿐이다.
 그러는 사이 한국의 외화 금고는 거의 바닥났다. IMF 구제금융을 받지 않고는 부도를 막을 방법이 없게 됐다. 구제금융을 받으면 IMF가 요구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시행해야 했기에 마지막까지 피하려 했던 길이지만 도리가 없었다.

11월 21일 오후 10시 정부가 “구제금융을 받겠다”고 발표한 뒤 IMF와 협상이 오갔다. 28일에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화해 “이르면 다음 주말경 한국이 부도에 직면할 수 있다고 들었다”면서 “신뢰를 회복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IMF와 합의해 발표해 달라”고 했다. 일종의 압박이었다.

12월 3일 IMF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IMF는 기업·금융·노동·공공 4대 부문의 시장경제적 구조개혁을 요구했다. 한국의 위기가 시장경제 원칙을 중시하지 않는 정부의 과도한 개입에 있다고 판단해서다. 당시는 대통령 선거 운동이 벌어지던 때였다. IMF는 김대중·이회창 등 대선 후보자들에게도 “당선되면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경제 주권을 잃었고, IMF 방식대로 구조조정이 이뤄졌다. 살아남은 은행과 기업은 탄탄해졌다. 97년 말 500%를 넘던 기업 평균 부채비율은 2000년 이후 200%대로 떨어졌다. 특히 30대 그룹은 200% 이하가 됐다. 당초 “적자 폭이 줄 것”이라고 것이라고 IMF가 전망했던 경상수지는 대규모 흑자로 반전했다. 그러나 이는 긴축을 위한 고금리 정책과 투자 둔화 등의 결과이므로 마냥 반가워할 수는 없었다.

경제성장률은 떨어졌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행하면서 98년 한국의 성장률은 -4.9%로 폭락했다. 휴전 이후 지금까지 한국 경제사에서 마이너스 성장은 80년, 98년, 2020년 세 번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의 충격과 2차 석유파동이 겹친 80년은 -1.5%였고, 코로나 사태로 경제활동이 크게 위축됐던 2020년에도 -0.7%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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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때인 98년에는 -4.9%였다가 이듬해 11.6% 성장으로 크게 반등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한국 경제성장률은 외환위기 이전 93~97년 5년간 연평균 8%에서 외환위기 이후 1998~2002년 5년간 연평균 5%대로 내려앉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수많은 실업자와 비정규직이 생겼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가 확대되고 소득분배가 악화했다. 재무건전성을 내세우다 보니 투자는 위축됐다. 이런 점들이 중장기 성장률을 끌어내렸다. IMF에 의한 구조개혁이 결국 ‘축복’ 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한국 경제 양극화 늪의 시작

과감한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구축하지 못하고 분배 악화와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라는 새로운 불균형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구조개혁이 시장 규율과 국제 규범, 그리고 금융기관의 건전성과 수익성을 지나치게 강조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IMF 탓만 할 수는 없다. IMF가 아니었다면 국가 부도 사태를 넘기지 못했을 테니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경유착과 과잉 대출 같은 문제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방치하고, 위기가 점점 다가오는데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해 결국 구조개혁 방향을 IMF라는 제 3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우리 경제 체질에 맞는 구조개혁을 스스로 추진하지 못하고 무작정 ‘글로벌 스탠다드’란 파도에 휘둘려야 했다.

저출생ㆍ고령화, 과도한 민간과 국가부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외교ㆍ통상 관계, 소득분배 악화 등 우리에게는 미래 위기를 부를 요인이 산재했다. 그러나 준비한 자에게는 위기가 오지 않는 법이다. 지나간 외환위기가 한국을 ‘준비된 자’로 만드는 결정적 트리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박원암 홍익대 명예교수·전 한국금융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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