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소고기·쌀 수입하라” 미국, 농산물카드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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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농산물 시장 개방에 대해 “전략적 판단을 해야 한다”며 일부 수용 가능성을 내비쳤다. 30개월 이상 미국산 소고기와 쌀 등 농산물 수입을 확대하라는 미국의 압박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여 본부장은 14일 세종정부청사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사실 농산물 (시장 개방)은 미국뿐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와 협상을 하건 고통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러면서 한국의 산업 경쟁력은 강화됐다”며 “제도 개선이나 경쟁력 강화, 소비자 후생 측면에서 유연하게 볼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감한 부분은 지키되, 그렇지 않은 것은 협상의 전체 큰 틀에서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 발언은 한국의 자동차·반도체 등 주력 산업의 관세 인하를 위한 협상 카드로 농산물 분야 일부를 미국에 양보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여 본부장은 지난 4일 국회에서는 미국의 농산물 시장 개방 압력에 대해 “우리가 방어를 해야 하는 부분은 강하게 방어하려고 한다”고 했지만, 지난 5~10일(현지시간) 미국과의 협상 이후 뉘앙스가 달라졌다.

미국은 현재 관세 협상을 벌이는 국가에 농산물 시장 개방을 밀어붙이고 있다. 일본에는 쌀 개방 압력이 심하다. 협상 타결이 근접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EU(유럽연합)·인도 등도 농산물 문제로 막판 난항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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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룸버그는 이날 “자동차와 농산물 관세가 협상의 막판 쟁점으로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한 통상 전문가는 “무역적자 해소를 원하는 미국은 상대국보다 우위에 있는 농산물의 수출을 확대하려고 한다”며 “베트남은 농산물 시장을 미국에 무관세로 개방하면서 조기 타결을 이룰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한국에도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미국은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수입 허용 ▶쌀 시장 개방 확대 ▶감자 등 유전자변형작물(LMO) 수입 허용 ▶사과·블루베리·체리 등 과일에 대한 검역 완화 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당국 관계자는 “지난 3월 무역장벽보고서(NTE)에서 제기한 문제가 대부분 포함됐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 소식통은 “한·미가 이견을 좁히지 못하는 분야 상당수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비관세 장벽 관련 사안”이라며 “여 본부장과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의 방미 이후 정부가 입장을 정하기 위해 다각도로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결단의 핵심은 농축산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쌀은 양보 못할 레드라인…정부 “LMO감자 수입은 논의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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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14일 관세 협상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 산업통상자원부]

또 다른 통상당국 관계자는 “한·미 양측이 아직 완전한 협상 카드를 꺼낸 상황이 아니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농축산물에 대한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상황에 따른 여러 가지 협상안을 가지고 막판 협상에 임할 예정이지만, 현재까지는 쌀 시장 완전 개방은 일종의 ‘레드라인’이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농축산물 수입 압박 완화를 위해 통상당국은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각종 환경 규제 등을 대폭 완화하는 카드를 제시할 거란 관측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3일(현지시간) 한국을 비롯해 일본과 유럽연합(EU) 등이 관세를 낮추기 위해 자국 시장을 개방하려고 한다면서 “한국은 상당한 관세를 내고 있고, (관세) 협상을 타결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대상국 모두 자기들의 방식을 매우 빠르게 바꾸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고민이 크다. 주무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에선 소고기와 LMO 감자 수입 정도가 가능할 것이라는 내부 평가가 나왔다. LMO 감자 수입 절차는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인체 안전성 검사만 남았고, 현재 수입 절차를 진행 중이다. 사과의 경우 “검역 과정에서 병해충 확산 우려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절차를 더 진행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1993년 한국에 사과 수입위험분석을 신청했는데, 현재 8단계 절차 가운데 3단계(예비위험평가)에서 멈춰 있다. 미국은 이에 대한 불만이 크다.

정부는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수입은 미국의 실익이 크지 않을 수 있어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본다. 이명박 정부 시절 광우병 사태로 번진 전례로 볼 때 미국산 소고기 전체에 대한 한국 소비자의 거부감을 높일 수 있어 미국 내에서도 의견이 갈려서다. 더욱이 한국은 지난해 미국산 소고기 최대 수입국이었다.

농민의 생계와 직결된 쌀 수입은 양보가 쉽지 않다. 한국은 2015년 쌀 시장을 개방하는 대신 513%의 고율 관세를 매기면서 세계무역기구(WTO) 규제에 따라 일정 물량(저율관세할당물량·TRQ)은 5%의 저율 관세로 수입하기로 했다. TRQ 물량(매년 40만8700t) 중 32.4%를 미국에서 수입 중인데, 이를 조정하려면 다른 국가와 협의가 이뤄져야 한다. 일각에선 “쌀 시장 개방 등 민감한 분야가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자칫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직면할 정치적 분수령이 될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 이날 여 본부장의 발언이 전해진 직후 전국농민회총연맹은 “미국의 비상식적이고 몰지각한 통상 압박에 굴복해 또다시 농업을 희생시키겠다는 것”이라며 “국민의 제2의 한·미 FTA 투쟁과 제2의 광우병 촛불로 화답할 것”이라는 입장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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