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우수 학생도 시달리다 자퇴"…학기말 '수행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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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 고등학교 3학년 A군이 수행평가 과제로 친구들과 함께 작성한 수학 탐구보고서. 실생활에서 미·적분이 활용된 사례를 찾아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독자제공
기말고사를 앞둔 지난달 말, 서울의 고3 A군은 수학 원리가 실생활에 활용된 사례를 설명하는 A4용지 5장 분량의 보고서를 쓰는데 며칠 밤을 꼬박 새웠다. 보고서엔 미분을 이용해 자동차의 운행 속도를 계산하는 과속 단속 카메라 운영 방식, 경제학에서 한계비용 등을 계산할 때 활용되는 각종 수식 등이 담겼다.
A군은 “대부분 수행평가는 조별 활동이 많은데, 학생마다 준비하는 대입 전형이 달라 참여도도 다 다르다”며 “이런 상황에서 학기마다 20개 정도 과제를 해야 하니 부담이 크다”고 했다.
1학기 종료를 앞둔 각 학교에서 수행평가를 둘러싼 잡음이 계속되고 있다. 수십여 개의 수행평가와 지필 기말고사가 몰린 학기 말은 고교생들에겐 ‘수행 지옥’으로 불린다. 학생의 부담이 크다 보니, 한 유튜버가 올린 수행평가 폐지 청원이 한 달여 만에 5만명 넘는 동의를 받았기도 했다. 교육부는 “모든 평가가 수업 내에서 이뤄지도록 과제형 평가를 없애겠다”고 했지만, 학교 현장에선 “유명무실한 대책”이란 반응이 앞선다.
“학기당 20~30개 수행평가 부담 커”
21일 교육계에 따르면 최근 각 학교에서는 생활기록부 작성을 포함한 성적 처리를 대부분 마무리했다. 이 중 학생과 교사에게 가장 골머리인 건 수행평가다.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교사들은 과목별로 학교 성적(내신)에서의 수행평가 비중을 20~40%로 규정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에세이, 탐구보고서나 발표(PPT), 실기시험 등 다양한 방식의 수행평가를 내고 있다. 이렇다 보니 학생들은 학기당 많게는 20~30개의 과제를 수행한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수행평가가 너무 어렵고 많다”고 토로한다. 경기도의 한 일반고 1학년 학부모는 “고 1 아이의 한국사 수행 과제가 ‘근대 이전의 국제 관계’ 비평 글쓰기인데, 이를 위해 참고할 자료 예시가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정책 관련 뉴스 등 어른도 어려워하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서울 한 고교 3학년 B군은 “일본어 시간에 일본 여행계획 세우는 PPT를 만드는 게 힘들었다”고 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K팝 악보 주고 2주 연습한 뒤 피아노 실기 평가를 한다”, “정보 과목에서 프로그래밍 필기시험을 본다” 등 불만이 쏟아졌다.

수행평가가 대입에 연결되니 학생 입장에선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인천의 한 일반고 교사는 “어떤 형식의 시험이든 0.1점 단위로 등급이 바뀌는 체제에서 학생들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수업시간에 작성, 제출까지 모두 끝내는 1200자 분량의 에세이 쓰기 과제를 내줘도 미리 집에서 써서 외워오는 학생들이 있다”고 전했다.
교사들은 ‘과정을 평가해야 한다’는 교육 당국의 지침, 부족한 수업일수 때문에 과제형 수행평가를 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 일반고 교사는 “과목에 따라선 사자성어 받아쓰기 같은 단순한 쪽지 시험도 학생의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지만, 과정 평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이드라인 때문에 에세이 위주의 수행평가를 출제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세·특 위해 수행평가 설계”
교육계에서는 대입에서 내신과 비교과 비중이 큰 학생부종합전형이 확대되며 수행평가의 중요도가 커졌다고 지적했다. 황지혜 전국중등교사노동조합 사무처장은 “생활기록부의 세특(세부능력·특기사항)에 쓸 거리를 만들기 위해 수행평가를 설계하는 구조”라면서 “수업 속에서 자연스럽게 평가하는 게 아니라 학생부 작성을 위한 절차로 '역설계'된다. 주객전도의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수행평가에 대한 과도한 압박은 아예 수행을 없애자는 청원으로 이어졌다. 지난달 15일 유튜버 강성태 씨가 국회전자청원사이트에 올린 수행평가 폐지 청원은 이날 기준 5만명 넘는 지지를 받고 있다. 중등교사노조가 지난 3일 공개한 교사 2554명 대상 긴급 설문 결과에서도 교사 59.4%는 수행평가에 대해 “평가를 위한 평가”, “형식적 평가” 등 혹평을 내놨다. 응답자 중 한 교사는 “우수한 학생이 한 학기 내내 수행평가에 시달리다 정시로 대입을 준비하겠다며 자퇴를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했다.

수행평가 조별 과제를 하고 있는 학생들. 중앙DB.
“과목별 특성 반영한 평가방식 등 근본적 대안 필요”
논란이 확산되자 교육부는 지난 2일 “과제형 수행평가를 없애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교사용 체크리스트를 배포해 학생들이 부담이 느끼는 과제형 수행평가 등을 내지 않도록 교사 스스로 확인하고, 각 교육청 차원에서 평가 내용을 포함한 교육과정을 점검하겠다는 내용이다. 또 각 시도교육청과 논의해 수행평가 비중 축소와 그 대안으로 서·논술형 평가 확대 등을 논의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현장 교사들은 "별 효과 없을 것"이란 반응이다. 서울의 한 특수목적중학교 교사는 “과정 평가 비중을 늘리라면서 과제형 수행을 줄이면 수많은 학생의 이력을 어떻게 일일이 들여다보고 학생부를 쓰냐”며 “대안 없이 평가 방법만 바꾸라고 하면 교사들은 막막하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수행평가의 도입 취지를 살릴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박용한 충남대 교육학과 교수는 “수행 운영 방식에 과목 특성, 교사 재량을 반영해 수업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성과물을 평가할 수 있는 구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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