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고통 드렸다” 이례적 檢 사죄… 성폭행범 혀 깨물어 ‘중상해’ 최말자씨 재심서 무죄 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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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 전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중상해 혐의 유죄 판결을 받았던 최말자(78)씨가 23일 부산지법에서 열린 재심 첫 공판을 마치고 법정을 나서며 ″이겼습니다″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성폭력 피해자로서 마땅히 보호받아야 했을 최말자님께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드렸다.” 23일 오전 11시 부산지법 352호 법정. 부산지검 정명원 공판부 부장검사는 피고인석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사죄드린다”며 이같이 말했다.

상대 혀 깨문 그 날, 가해자ㆍ피해자 뒤바뀌었다

이날 부산지법에선 10대 시절 성폭행을 시도하는 남성의 혀를 깨물었다가 유죄를 선고받은 최말자(78)씨의 중상해 혐의 사건 재심 첫 공판이 열렸다. 정 부장검사는 “최씨에게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공판부장이 직접 법정에 선 것도, 심문없이 곧장 무죄를 구형한 점도 이례적이다.

이 재심 발단이 된 사건은 1964년 5월 6일 경남 김해군(지금의 김해시)에서 일어났다. 당시 만 18세이던 최씨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노모씨(당시 21세)의 혀를 깨물었다. 노씨의 혀가 1.5㎝ 잘려나갔다. 성폭행에 저항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이 일로 최씨에겐 중상해 혐의가 적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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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홍 기자

성폭행 사건 피해자인 최씨는 이 일로 ‘가해자’가 돼 수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최씨는 “노씨와 결혼하라”는 등 모멸적인 말을 들어야 했다. 검찰은 최씨의 ‘정당방위’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영장 제시도 없이 구속했다고 한다.

법원은 오히려 ‘피해자’인 노씨 처지에 집중했다. “(노씨의) 혀를 끊어버림으로써 일생 말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되게 한 것은 정당한 방위의 정도를 지나쳤다”는 게 당시 법원 판단이다. 1965년 1월 최씨에겐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최씨는 법을 몰라 항소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노씨 재판에선 최씨에 대한 강간미수 혐의조차 적용되지 않았다. 특수주거 침입과 특수협박죄만 적용돼 노씨에겐 최씨보다 가벼운 징역 6개월의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최씨 사건은 이후 형법 교과서에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은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1995년 법원사에서는 ‘강제 키스 혀 절단 사건’으로도 소개됐다.

‘미투’ 속 어렵게 낸 용기, 61년 만의 재심 일궈

성폭행을 당할 뻔했단 사실도, 그 과정에서의 저항 때문에 유죄 선고를 받은 일도 최씨에겐 평생 상처로 남았다. 그런 최씨는 2013년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에 입학, 2019년 졸업한 일을 계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젠더폭력’ 등 개념에 눈뜨며 부당한 판결을 뒤엎겠다는 결심이 섰다. 당시 성폭행 등 피해 사실을 공개하며 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미투’ 운동 분위기도 최씨에게 용기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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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성폭력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고의에 의한 상해'로 구속 수사 및 유죄 판결을 받은 최말자 씨가 2023년 5월 3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 촉구 탄원서를 제출하기 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는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ㆍ인권단체의 문을 두드렸고, 이들과 함께 2년 넘게 증거 자료 등을 수집해 2020년 5월 유죄를 선고받은 중상해 사건 재심을 청구했다. 사건 발생 56년 만이다.

재심 결정을 받아내기까지 과정은 험난했다. 1ㆍ2심(부산지법ㆍ고법)에선 검찰 측 불법 구금(영장 제시 없이 구속)이나 자백 강요에 대한 증거가 없으며, 정당방위를 인정할 만한 새로운 증거 또한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하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지난해 12월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재심 청구를 기각한 원심 결정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최씨가) 검찰에 처음 소환된 1964년 7월 초순경부터 구속영장이 발부, 집행된 것으로 보이는 1964년 9월 1일까지의 기간 동안 불법 체포ㆍ감금된 상태에서 조사받았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했다. 이에 따라 당시 재심 대상 판결문과 신문 기사, 재소자 인명부, 형사 사건부, 집행원부 등 법원 사실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겼다” 삼창… “정당방위 인정 판도 바뀔 것”

검찰 사과와 무죄 구형을 받아든 최씨는 법정을 나서 “이겼습니다”라고 세 차례 외쳤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 활짝 웃으면서도 눈물이 맺힌 모습이었다. 그는 “아직 실감은 안 난다. 지금이라도 검찰이 잘못을 인정하니, 대한민국 정의는 살아있다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여성의 전화와 (도움 준) 변호사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응원 덕에 이 자리까지 왔다“며 ”모든 게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덕분“이라고도 덧붙였다.

재심 선고는 오는 9월 10일이다. 법조계에선 검찰 무죄 구형이 받아들여질 거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법무법인 파트원 이원하 대표 변호사는 “피의자가 범죄 혐의가 있다고 기소해 처벌을 구한 검찰이 스스로 피의자가 혐의가 없다고 사죄하며 무죄를 구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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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 전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중상해 혐의 유죄 판결을 받았던 최말자(78)씨가 23일 부산지법에서 열린 재심 첫 공판을 마치고 법정을 나서며 변호인과 여성단체와 포옹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어 “특히 이 사건은 성폭력 사건에서 정당방위를 극히 제한적으로 인정해왔던 과거 우리 사법체계에 대해 검찰이 스스로 반성한다는 의미도 담겼다. 이번 사례는 앞으로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방어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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