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시효 지난 빚 일부 갚았어도 전부 갚겠다는 표시 아냐”…대법, 58년 만에 판례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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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 시효가 지난 상태에서 돈을 갚을 경우, 이를 채무자가 나머지 빚을 다 갚겠다는 의사 표시로 봐선 안 된다는 대법원 판단이 24일 나왔다. 지금까지 판례는 소멸시효가 지난 빚을 일부라도 갚으면 나머지도 전부 갚겠다는 의사 표시로 추정한다는 것이었는데 대법원이 58년 만에 판례를 바꿨다. 기존 판례는 채무자에 불리한 구도이자 일반 상식에 부합하지 않다는 취지에서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뉴시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조희대 대법원장)는 이날 어업종사자 A씨가 제기한 배당이의의 소에서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 시효완성의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본 1967년 2월 선고된 66다2173 판결은 이 판결의 견해에 배치되는 범위에서 변경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A씨 주장을 종전 판례대로 배척한 원심판결은 파기돼 인천지방법원으로 되돌아갔다.
사건은 A씨와 동료 어업 종사자 B씨간 금전 거래에서 비롯됐다. A씨는 2006년 12월 이자율 연 20%로 3000만원(1차 차용금)을 빌리며 변제기(갚기로 한 기한)를 2009년 12월로 설정했다. 2009년 6월엔 이자율을 정하지 않고 9000만원(2차)을 빌리며 2009년 12월까지 갚겠다고 했다. 2011년 1월엔 이자율·변제기를 정하지 않은 채 2000만원(3차)을 빌렸다. 2015년 11월에도 추가로 1억원(4차)을 더 빌렸다.
그간 한 푼도 갚지 않은 A씨는 이때 처음 차용증을 썼는데 “원정: 전미수금 1억4000만원, 합계 2억 4000만원” “원금은 2016년 11월 1일까지 변제” “이자는 연 150만원” “3개월 미납 시 경매 처분” 등의 내용을 적었다. 하지만 A씨는 2015년 12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월 150만원씩 총 1800만원 갚은 것이 전부였고, 결국 B씨는 A씨 부동산을 경매로 넘겼다.
2020년 1월 법원이 부동산 배당금 5억4600만원 중 B씨에게 4억6100만원을 우선 배당하고 세금 등을 제한 나머지 4300만원을 A씨에게 배당하면서 A씨가 문제를 제기했다. 차용증 작성은 앞선 세 차례의 채무 관계를 정리하고 이자율 등을 새로 정한 경개(更改)계약이라며, 채권액은 2억9500만원(원금 2억4000만원+2016년 12월부터 2020년 1월까지의 이자 5500만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쟁점인 소멸시효와 관련, 1·2심은 기존 판례를 따랐다. 1·2차 차용금 원금(변제기로부터 5년)과 이자(3년) 채무 시효가 지난 후 쓴 차용증 및 1800만원 변제가 근거였다. 시효가 지나면 채무자는 법적으로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 2023년 4월 2심 재판부는 “A씨가 차용증에 1·2차 차용금의 원금을 포함해 기재한 것은 소멸시효 완성의 이익을 포기한 것”이라며 “채무의 일부를 변제한 것도 1·2차 차용금 이자에 대한 소멸시효 완성의 이익을 포기한 것”이라고 했다. 이는 기존 대법원 판례에 따른 것으로, 채무자가 소멸시효가 지난 빚을 일부라도 갚으면 나머지 빚도 전부 갚겠다는 의사 표시로 해석한 것이다.
"채무자 시효완성 인지 여부, 종합적 사정 봐야"
하지만 이날 대법원은 조 대법원장 등 8명 재판관 다수 의견으로 원심이 적용한 “추정 법리는 경험칙에 어긋난다”고 뒤집었다. “A씨가 1·2차 차용금 이자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1800만원을 일부 변제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그것만으로 A씨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고 추정할 수는 없다”며 “원심은 시효이익 포기에 관한 법리를 오해했다”고 지적했다.
기존 판례를 깬 대법원은 그러면서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는지 여부는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새 기준을 제시했다. “채무자가 시효완성으로 채무에서 해방되는 이익을 알면서도 채무를 부담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는 것은 이례적”이라며 “경험칙에 비추어 보면,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면서다.
다만 노태악 대법관 등 5인은 “판례 변경이 필요하지 않다”는 별개의견을 냈다. “대법원은 추정 법리를 유지하면서도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를 준별하고 있고,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가 존재하는지에 관한 의사해석을 통하여 구체적인 사건에서 타당한 결론을 도출해왔다”며 “추정 법리의 근거인 경험칙이 처음부터 명백히 잘못됐다고 볼 만한 자료가 없다”는 의견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례 변경에 대해 “일반인의 상식과 경험칙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려웠던 획일적인 추정 법리를 폐기하고, 원칙으로 돌아가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도 그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했는지 아닌지를 구체적으로 판단하도록 함으로써, 채무자에게 불리하게 치우쳤던 심리 구조를 공평하게 바로잡는 의의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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