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김혜순 『죽음의 자서전』 번역한 박술 시인 “온 몸으로 언어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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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 현대시를 독어로 옮기는 작업을 하는 이는 박술이 거의 유일하다. 지난 6월 열린 베를린시축제에서 카타리나 슐텐스 집행위원장은 “박술은 한국과 독일 시문단에서 필수적인 목소리이자 연결고리”라고 극찬했다. 사진은 지난 17일(현지시간) 독일 국제문학상 시상식에 자리한 박술 시인. 사진 HKW
철학자, 시인, 그리고 번역자. 모두 박술(39)이라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언뜻보면 연관이 적어보이지만, 그의 삶이 이 단어들을 연결지었다.
헤르만 헤세를 좋아하던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독일로 혼자 유학을 떠났다. 독일과의 연(緣)은 훨씬 전부터, 일제강점기 독일 예수회 신부들을 사사(師事)한 철학자 친할아버지와 독일에서 공부한 물리학자 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독일에 발을 딛고 나선 본격적으로 ‘이중언어 사용자’의 삶이 열렸다. 괴로운 유학길에 번역을 버팀목 삼았다. 숨 쉬듯 하던 번역은 어느새 체질이 됐다.
현재 독일 힐데스하임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번역철학에 관심을 둔다. 김혜순 외에도 김소연·김리윤 등 한국 시인의 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지난 3월 출간한 자신의 첫 시집 『오토파일럿』엔 이중언어 사용자로서 번역을 통해 채집한 감각을 풀어냈다. 그가 “시쓰기와 번역은 몸으로 언어를 옮기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자신을 “기본적으로 번역가”라고 소개하는 이유다.

울리아나 볼프와 박술이 공역한 『죽음의 자서전』독일어판 표지. 김혜순의 딸이자 시카고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현대미술가 이피(이휘재)가 그린 그림 '20160901'이다. 사진 문학과지성사
그는 지난 17일(현지시간) 독일 국제문학상 시상식에 섰다. 지난 2월 출간된 김혜순 시인의『죽음의 자서전』독일어 번역본(‘Autobiographiedes Todes’) 공(共)역자로서다.
매년 현대문학의 뛰어난 작품 중 독일어로 번역된 첫 작품에 수여하는 이 상을 원작자 김혜순과 공역자인 시인 울리아나 볼프·박술이 함께 받았다. 심사위원단은 만장일치로 이 작품을 꼽으며 “출발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달되는 탁월한 번역”이라고 극찬했다.
『죽음의 자서전』은 김혜순의 열두번째 시집으로, 한국에서 2016년 출간됐다. 죽은 자의 영혼이 구천을 떠도는 시간인 불교의 ‘사십구재’ 개념을 착안, 죽음에 관한 마흔아홉 편의 연작시로 구성됐다. 국제문학상 심사위원이자 독일의 문학잡지 ‘프라이텍스트’ 편집장 데니즈 우틀루는 “이 시들은 기적이다. 저승의 문턱에서 만들어지는 울림을 그대로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고 평했다.
수상을 마친 지난 21일, 독일에 거주 중인 박술 시인과 서면 인터뷰를 했다. 그는 “(국제문학상) 후보를 봤을 땐 희망이 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아시아인의 수상도, 시 장르의 수상도 없었기 때문이다. 김혜순 역시 박술에게 “괜한 기대는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독일 문단의 반응은 달랐다. 지난 6월 독일에서 열린『죽음의 자서전』 낭독 투어에서 독일 작가와 평론가들은 김혜순 시인과 박술 시인을 붙잡고 자신이 느낀 이 책의 문학적 가치를 말했다. 박술은 “그것만으로도 기뻤는데, 상을 받아보니 얼떨떨하다”고 수상소감을 전했다.

이중언어 사용자인 박술과 달리 공역자 울리아나는 한국어를 전혀 못한다. 그는 독일어 초역 시 영어 번역본을 전혀 참고하지 않았고, 울리아나는 반대로 영어 번역본과 비교하는 방식으로만 접근하기도 했다. 사진 HKW
- 『죽음의 자서전』 번역은 어떻게 시작됐나.
- “2022년쯤 독일 시인들 사이에서 『죽음의 자서전』 영어 번역본이 많이 읽혔다. (독일 문단에서) 한국 시가 주목 받는 경우를 처음 접해, 바로 번역하고 싶다고 연락했다. 마침 영어 번역을 맡은 최돈미 시인과 친분이 있던 울리아나가 독어 번역본 공역자를 찾고 있었다.”
2019년 출간된 최돈미 시인의 영어 번역본은 길잡이가 돼줬다. 박술은 “(영어 번역본은) 한국어 원문보다 구어체에 가깝고, 언어의 맛을 살린 번역”이라고 봤다. 그는 “영어 번역본의 방향이 맞다고 생각했다. 내러티브를 살려야하는 소설과 달리 시의 번역은 어조와 음색이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더 감각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 공역의 과정은 어땠나.
- “둘 다 시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이미지와 발음 등을 종합적으로 느끼고 더 맞는 감각을 설계하려 했다. 시에 나오는 수많은 의성·의태어들을 입으로 말해보고, 귀로 들어보고, 손짓 발짓으로 설명하며 옮겼다. 김혜순 시인은 그저 번역자들을 믿고 맡기셨다.”

1979년 『문학과 지성』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김혜순(사진) 시인의 시집은 번역출간 예정인 중국을 포함,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덴마크어 등 8개국에 번역되며 명성을 펼치고 있다. 앞에 놓인 책은 지난달 출간된 『김혜순 죽음 트릴로지』. 사진 문학과지성사
- 번역을 위해 독일어에 없는 표현도 사용했다고.
- “독일어엔 동어반복을 통해 의태어를 표현하는 일이 거의 없는데, 의성어·의태어를 살리기 위해 현지에 없는 동어반복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국어 시의 작성 방식을 따라 독일어의 자연스러운 문장구조를 왜곡하다 보면, 한국어스러운 독일어 문장이 탄생하기도 한다.”
박술이 말하는 ‘한국어스러운 독일어 문장’은 어떻게 탄생할까. 그는 2주 간의 시간을 들여 번역했다는 표현을 예로 들었다.
네 온몸을 네가 모르는 것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맑음이 도착했다/오르가슴에 빠진 눈동자 같은 맑음이 이불을 들치고 도착했다/꿈과 같은 화학기호를 가진 너의 영혼의 거처에 꿈과 같은 화학기호를 가진 맑음이 도착했다/저녁을 굶은 저녁의 맑음이 도착했다
『죽음의 자서전』 속 열여섯번째 시, ‘나체’의 첫번째 연이다. 4행 모두 주어가 ‘맑음’ 이다. 독일어 문장을 만들면 주어가 맨 앞에 오는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어떤 맑음이 도착했다’로 문장을 시작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자연스러운 독일어 문장에 맞게 수정하면 정보의 순서가 완전히 뒤집힌다. ‘어떤 맑음이 도착했는데, 그 맑음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 모든 것을 너는 모르고 있다.’라고 번역하면 길고 긴 수식어를 통과해 겨우 쥘 수 있는 ‘맑음’의 드라마틱한 효과가 사라져버린다. 고민을 거듭하다, ‘도착하다’라는 중요한 동사를 빼고, 시제도 바꾸고, 순서를 다시 뒤집었다.”
첫 문장의 독일어 번역은 이렇다. ‘Sie kennt deinen Körper, alle innersten Winkel, die du nicht kennst – diese Klarheit’ 이를 다시 한국어로 옮겨보면 대략 이렇다. ‘그것은 네 몸을 남김없이 알고 있다, 네가 모르는 곳까지도 – 이 맑음은’

『죽음의 자서전』 속 서른 여섯번째 시 ‘아님’에는 ‘아님’의 수많은 변형을 외는 구절이 있다. 박술은 이 부분을 옮기며 시집 전체를 번역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겠다는 확신을 느꼈다. ‘경계언어의 모순들과 번역의 문제’를 다룬 그의 박사논문 주제와 정확히 연결됐기 때문이다. 사진 HKW
- 철학자·시인·번역가로서 앞으로 계획 중인 일이 있다면.
- “김혜순 시인의 작업을 번역하고, 대담을 편집하고 소개하면서 내가 가진 여러가지 능력들이 처음으로 하나로 모이는 느낌을 받았다. 첫 시집을 낸 이후 꾸준히 시를 쓰고 있다. 철학 쪽은 좀 더 야심이 있다. 한국철학이라는 분과를 유럽에서 새롭게 구축해보고 싶은 생각이다. 이곳에서 한국철학은 한국 시보다도 훨씬 더 척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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