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상대적으로 선방' 평가 속..."농산물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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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타결된 한ㆍ미 관세 협상은 미국이라는 거대 소비 시장을 놓칠 수 없는 한국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내줄 수밖에 없는 협상이었다. 협상의 데드라인(8월 1일)이 정해진 와중에, 15%라는 하한선이 미리 정해져 있어서다. 한국보다 먼저 협상을 마친 일본과 유럽연합(EU)은 각각 5500억 달러와 6000억 달러 등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고도 15%의 관세를 부과받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관세협상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이날 중앙일보와 통화한 통상 전문가들 상당수도 이런 협상의 특성을 들어 “상대적으로 선방한 협상”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농축산물 시장의 추가 개방이 없었다는 점 등이 이유였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원장은 “한국이 매우 선방한 협상”이라며 “농축산물 시장을 개방하지 않은 데다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도 일본에 비해 규모가 낮은 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기준 한국의 대미무역 흑자 규모는 660억 달러로 일본(685억 달러)과 비슷한 수준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협상을 더 끌어 상호관세가 부과됐다면 더 불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대미 투자 등을 상당액 양보했지만 다른 주요국에 비해서는 선방한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농축산물 시장 개방에 대해 평가가 엇갈리기도 했다. 익명을 요청한 통상전문가는 “농산물의 추가 개방이 없다는 현금을 받기 위해 막대한 대미투자라는 어음을 준 것 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ㆍ미 자역무역협정(FTA) 수혜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한 건 아쉬움으로 꼽힌다. 이번 협상을 통해 그동안 관세 없이 수출되던 한국산 자동차의 대미 관세율은 15%가 됐다. 반면 일본과 EU 자동차의 관세율은 2.5%에서 15%로 12.5%포인트 올랐다. 최병일 태평양 통상전략혁신 허브 원장은 “한국은 FTA 체결 국가였는데 일본, EU와 같은 수준으로 관세를 받게 됐다”며 “미국이 15% 관세를 못 박았더라도 관세를 내리기 위한 추가 시장 개방 등의 카드를 더 탐색해봤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외교부 2차관을 지낸 이태호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한국이 한ㆍ미 FTA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본 게 자동차였는데 일본 등과 이제 똑같은 상황이 됐다”며 “한국이 공산품 수출 등에서 이익을 많이 본 한미 FTA의 미래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박경민 기자
조선업 분야에서 1500억 달러, 나머지 분야에 2000억 달러 규모로 조성하기로 한 대미 투자 펀드에 대해서는 ‘기회’라는 평가도 나왔다. 허 교수는 “한국이 미국 제조업 재건 사업에 참여하는 성격도 있기 때문에 기회의 창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 원장도 “미국의 공급망 재편에서 한국과 일본, EU가 동맹을 맺었다는 게 정확한 분석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투자 금액 등이 명확하지 않은 만큼 향후 한국의 부담을 잘 살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특히 20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펀드는 사용처와 구체적인 재원 등이 정해져 있지 않다. 박성훈 고려대 국제대학원 명예교수는 “우리가 주도권을 쥔 1500억 달러의 조선 분야 투자와 달리 2000억 달러 규모의 펀드는 꼬리표가 달렸지 않다”며 “남은 펀드에 우리가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아주 세심한 패키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남은 2000억 달러 펀드도 2차전지, 바이오, 원자력 등 한국의 장점이 있는 곳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일본과 달리 이번 합의에는 미국이 투자 권한을 직접 ‘소유·통제한다’는 구속력이 강한 문구가 포함돼 향후 투자 이행 과정에서 논란이 불거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루스소셜에 “한국은 미국이 소유하고 통제하며(owned and controlled by the United States), 내가 대통령으로서 선정한 투자(and selected by myself)에 대해 3500억 달러를 미국에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지난 22일 일본과의 무역협상에서 일본 투자에 대해 언급한 “일본이 내 지시에 따라 (at my direction) 5500억 달러를 투자한다”는 내용과 차이가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신문(닛케이)도 이 부분에 주목했다. 닛케이는 31일 “트럼프 대통령이 SNS에 ‘미국이 소유하고 관리한다’는 문구를 덧붙였는데, 이는 일본과의 합의 발표 당시 볼 수 없었던 표현”이라고 해석했다.
이번 합의안에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투자 ▶온라인플랫폼법·망 사용료 등 디지털 규제 ▶방위비 인상·미국산 무기 구입 확대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또 철강은 기존의 50% 고율 관세가 그대로 유지된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번 협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며 "이번 합의는 소나기를 피한 것일 뿐, 언제든 다시 위기는 닥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다자무역체제는 사실상 작동하지 않고 있고, 기업은 스스로 체질을 바꿔야 하며 정부는 제도적 선제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은 과제로는 모호성 해결이 꼽힌다. 이 고문은 “이번 합의는 상당 부분을 전략적 모호성으로 남겨놨는데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다”며 “미국이 강대국인 만큼 자신들에게 유리한 해석을 시간을 들여가며 관철할 수 있는 만큼 구체적인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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