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쟁을 기록하러 나선 우크라이나 소설가, 미완의 일기에 담긴 것[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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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여성과 전쟁
빅토리아 아멜리나 지음
이수민 옮김
파초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지우기 위한 러시아의 도발은 애초 수일 정도면 손쉽게 끝날 것으로 예상됐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러시아의 승리가 너무나도 명백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로지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쳐 전쟁은 러시아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수많은 우크라이나 예술가는 전쟁 개시 이래로 본업을 포기한 채 자국을 방어하고 시민들을 돕는 데 헌신하고 있거나 이미 전쟁의 희생자가 됐다. 빅토리아 아멜리나는 그중 한 명이다.  조지프 콘래드 문학상을 수상한 유명 소설가이자 시인, 에세이스트, 동화작가인 아멜리나는 국제적인 활동을 했으며 문학 축제를 기획하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면전에 돌입하면서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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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24일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주거용 건물이 러시아군의 드론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모습, [EPA=연합뉴스]

아멜리나는 소설가와 한 아이의 엄마에서 전쟁범죄 조사원으로 탈바꿈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잔혹 행위를 기록하는 단체인 비정부기구 트루스하운드와 함께 전쟁범죄 조사에 나섰다. 도서관 벽에 뚫린 포탄 구멍들, 폐허로 변한 학교와 문화센터를 사진으로 남겼고 전쟁범죄 생존자들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기록했다. “오직 진실을 밝히고 기억의 생존을 보장하고 정의와 영구적인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나는 이 일을 수행했다”고 그는 말했다.

아멜리나는 악몽처럼 왜곡된 현실의 감각을 기록할 방법을 모색하다가 전쟁일기를 쓰고 책으로 펴내기로 한다. 아멜리나의 일기는 일반적인 일기와는 달리 정기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으며 정확한 날짜가 표기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의 일기는 2023년 6월 23일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6월 27일 우크라이나 작가들이 모여 있던 식당에 러시아 미사일이 떨어져 중상을 입은 아멜리나가 나흘 뒤 숨졌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일기를 모아 펴낸 책이 미완으로 남은 『여성과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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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전쟁' 의 지은이 빅토리아 아멜리나. [사진 파초]

사망할 무렵 아멜리나는 이 책의 60% 정도를 집필한 상태였다. 원고의 대부분은 파편적이고 다듬어지지 않고 편집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 책을 펴낸 편집자들은 아멜리나의 원고에 최소한의 개입만 하기로 원칙을 세웠고 개입이 불가피한 경우 독자들에게 그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기로 했다.

이 일기에는 일반 미디어의 뉴스에서는 볼 수 없는 민간인을 향한 공격과 폭력, 고문과 협박, 아동 납치의 참상이 담겨 있다. 그렇지만 작가는 고문과 학살을 일삼는 침공자들의 서사를 일기의 중심에 놓지 않았다. 평범하지만 동시에 영웅적인 면모를 지닌 전쟁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아멜리나는 전쟁범죄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처럼 전쟁범죄를 기록하려는 여성들,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러시아의 폭압에 맞서는 전쟁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저명한 변호사였지만 군인이 돼 하르키우 마을들의 해방을 돕고 최전선에서 역사적인 온라인재판에 참여했던 예우헤니아 포도브나, 수만 건의 전쟁범죄 기록을 주도해서 2022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한 시민자유센터 대표 올렉산드라 마트비추크, 동료 작가 볼로디미르 바쿨렌코가 태어난 마을의 용감한 사서이자 그의 납치 및 살해에 관한 이야기가 포함된 영상을 가까스로 찾아낸 율리야 카쿨랴다닐류크 같은 여성 영웅들의 스토리가 담겨 있다. 파괴된 여성들의 아파트, 탈출 시도, 살해된 여성들의 파트너와 한때는 행복했던 아이들이 지었지만 지금은 조각나고 만 레고 블록에 관한 이야기를 촘촘히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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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빅토리아 아멜리나. [사진 ⓒMay Lee]

아멜리나는 전쟁 중에도 결국 어떤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시동이 꺼지는 낡은 승합차로 시민들을 대피시킨 여성들, 목숨 걸고 지뢰를 제거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도 인간이란 원래 어떤 존재로 남아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아직도 비인도적 우크라이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미완으로 남은 이 비극적인 책은 아멜리나의 살아 있는 생생한 목소리다. 전쟁의 잔악함을 고발하고, 침략자에게 저항하는 담대한 여성들에게 헌사를 바치는 ‘우크라이나판 안네의 일기’인 이 책을 통해 하루빨리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다시 찾아오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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