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시 추천’ 하나로 굿즈만들고, 팝업에 백일장까지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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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만난 포엠매거진 배동훈 대표는 시를 너무 좋아해 시를 알리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인생의 모토라는 그는 패션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브랜드 마케터를 하다, 이제는 시 인플루언서로 활동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를 쉽고 간편하게 느끼도록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이 사람, 시인이 아니다. 편집자도 아니다. 배동훈(28) 대표는 포엠매거진(Poem Magazine)이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시를 소개하는 시(詩) 인플루언서다. 그를 지난 4일 경기도 수원시의 한 독립서점에서 만났다.

계정을 만든 시점은 퇴사 직후다. 그는 2023년 여름부터 한 대기업의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다, 직무와 맞지 않는다는 걸 느끼고 지난해 2월 그만뒀다. 이후 포엠매거진 이름으로 오프라인 팝업스토어 3번, 온라인 백일장 2번을 열며 8만 팔로워와 시에 대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 지난 3월엔 SNS 마켓으로 사업자 등록을 마쳤다.

“시를 열심히 좋아하며 느꼈던 것 중 하나가 나는 시인은 못 되겠다는 생각이었다”는 배 대표는 “그러면 시를 알리는 사람이 되자. 시를 좋아하는 마음은 똑같으니까”라고 생각해 이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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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가볍게 소비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는 "반문하고 싶다. 돈이 없으면 시를 쓸 수가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책만큼 굿즈가 조명받는 현재 상황에 대해서도 "굿즈로 안 좋은 책을 포장하는 경우는 없다. 나쁘게 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사진 배동훈 포엠매거진 대표 제공

계정이 주목 받은 1년여 동안, ‘텍스트 힙 열풍’이 생겨났고, 시의 대중성도 높아졌다. 특히 10~20대에게 시가 많이 읽히기 시작했다. 포엠매거진의 팔로워도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이 대부분이다. 지난 3월 예스24의 발표에 따르면 10~20대의 시 구매 비율은 최근 6년간 매년 증가했다. 올해는 2020년(11.7%)의 2배에 가까운 19.2%를 기록했다. 한국 시 분야에선 20.1%로 처음 20%대를 넘었다.

시의 인기는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쇼츠 영상을 즐기는 요즘 트렌드와도 맞닿아있다. 배동훈 대표 역시 “소설은 못해도 200~300페이지라 부담스러운데, 시는 한 페이지일 때도 있지 않나. 롱폼 영상을 볼 때보다 쇼츠를 보는 게 쉬운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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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장 최근 올린 시 추천 게시글은 ‘제목만 읽어도 빠져드는 시가 있다’. 최백규의 『여름은 사랑의 천사』(2025, 문학동네), 권누리의 『한여름 손잡기』(2022, 봄날의 시집), 이규리의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2025, 문학동네), 여세실의 『휴일에 하는 용서』(2023, 창비) 등 8권을 추천했다. 사진 포엠매거진(@poemmag) 인스타그램 캡처

배 대표가 하는 대부분의 업무는 시 추천 게시글을 올리는 것이다. 게시글 한 편이 올라가기 까지 짧게는 하루, 길면 2주까지 걸릴 때도 있다. 기획과 디자인, 계정 운영까지 모두 배 대표 혼자 한다. “(추천 기준에) 내 취향이 60% 반영됐다면, 40% 정도는 유행을 고려한다. 최근엔 (계절을 고려해) 여름에 어울리는 시를 큐레이션하는 빈도가 높아진다.” 그가 계정에 추천한 여름 도서는 『자명한 산책』(황인숙),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문보영)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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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으로 진행한 2회 백일장은 지난해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접수를 받았다. 1155편의 시가 도착했고, 그중 5편의 시를 추려냈다. 포엠매거진(@poemmag) 인스타그램 캡처

포엠매거진은 처음에 굿즈로 알려졌다. 커뮤니티에 떠돌던 사진에서 착안해 ‘외계인 침공 시 시 안 읽는 사람이 먼저 잡아먹힌다’는 문구를 넣어 티셔츠로 만들고, 밈(Meme)을 활용한 스티커와 키링을 제작했다. 지난해 서울국제도서전에선 문학동네와의 협업을 통해 문학동네 시집 구매자에게 포엠매거진 굿즈를 배부하기도 했다.

그러다 백일장도 열었다. “구독자들과 주기적으로 소통한다. 계정 개설 3개월이 지날 때쯤, 구독자들이 백일장을 열어달라고 했다.” 메일로 신청을 받았더니 500편의 글이 도착했다. 배 대표는 “신인을 발굴하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냥 구독자의 요청에 진행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2회 백일장을 열 때는 좀 더 신경을 썼다. 『샤워젤과 소다수』를 쓴 고선경 시인과 『온』,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등을 쓴 안미옥 시인에게 객원 심사위원을 부탁했다. 5명을 선정하기로 했는데 무려 1155편의 시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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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셔츠와 키링 등을 판매했던 팝업스토어. 사진 배동훈 포엠매거진 대표 제공

시간이 지날수록 출판계는 물론, 시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브랜드들도 문을 두드렸다. 신간 광고와 함께 주류 브랜드와 의류 브랜드의 연락도 받았다. 이중 삼성카드와 인생네컷, 예스24와는 실제 협업을 진행했다. 시를 통해 카드를 홍보하거나, 포엠매거진 굿즈를 활용해 홍보를 진행하는 등 협업 방식이 다양했다.

“지금은 프리랜서로서 경제적으로 만족할 만큼 자리 잡은 상황”이라고 말한 그는 “앞으로 수익이 낮더라도 시를 더 알릴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준비 중인 프로젝트는 가을 중 열릴 오프라인 독서 행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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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훈 대표는 “신논현역이나 광화문역 교보문고에 가면 과거 출판된 시집과 최근 출판된 시집이 모두 있다. 거기서 시를 쌓아두고 3~4시간 동안 읽곤 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가 이렇게까지 시에 빠진 이유가 뭘까. “스무살 때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류시화 시인의 책을 읽었다”는 그는 “갑자기 시의 구절들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정신없이 시를 쓰고 읽었다. 계기가 뚜렷하지 않으니 더 좋아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시를 읽으면 내부에서 목소리가 태어나는 것 같다. 나와 시 안의 문장들이 공명하는 순간이 좋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황인찬 시인과 안미옥·고선경·김복희·진은영 시인 등이다. 요즘엔 유수연 시인과 송희지 시인을 주목하고 있다. 6일엔 시를 좋아하는 이유들을 담아 『사랑은 즐거워 시는 대단해』(포르체)라는 제목의 산문집도 출간했다.

“이 기사를 읽을 독자들께, 시를 읽으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내가 몰랐던 세계가 열리는 기분을 꼭 느껴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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