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독립 만세" 외친 왕종순, 겨우 14세였다…또 다른 유관순 178명[잊힌 독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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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화여학교 학생 왕종순은 만 14세이던 1920년 3월 3·1운동 1주년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연행, 유죄 선고를 받았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DB

 80년 전 광복은 수많은 순국 선열의 희생을 통해 현실이 됐다. 이 중에는 백범 김구나 도마 안중근처럼 널리 추앙받지는 못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 없이 일제에 저항해온 숨겨진 독립운동가가 더 많지만, 대부분은 기록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중앙일보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독립기념관 산하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이 찾아낸 ‘잊힌 독립 영웅’의 흔적을 조명했다. 지난 2018년 발족한 TF팀이 지금까지 발굴한 독립운동가는 모두 3595명. 존재조차 몰랐던 영웅을 함께 기억함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빛을 찾는 길을 따라가 본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1920년 3월 1일 오전 8시쯤, 서울 인왕산 남측 자락의 필운대 바위에서 여학생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배화여학교 학생 40여 명이 3·1운동 1주년을 맞아 벌인 만세 시위였다.

강원 양양 출신의 김경화(당시 만 18세)와 서울 출신 이수희(만 15세)가 빨래를 널러 가는 척 대야를 들고 먼저 학교 뒷산 필운대에 올랐다. 그들이 언덕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게 신호탄이라도 되는 듯 여학생 수십 명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교정까지 내려오며 있는 힘껏 만세를 외쳤다.

그중에서도 유독 앳돼 보이는 여학생이 있었다.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작은 손에 직접 만든 태극기를 꼭 쥔 채 목이 터지라 만세를 부른 그는 겨우 열 네살이던 2학년생 왕종순이었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는 데는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없었다. 하지만 여성 독립운동가의 행적 발굴은 지금껏 미흡했던 게 사실이다. 올해 3·1절을 기준으로 국가보훈부가 독립 유공자로 공식 포상한 1만 8258명 가운데 여성은 664명(3.6%) 뿐이다. 독립기념관 산하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이 약 7년 간 여성 독립운동가 178명을 찾아내 기록으로 남긴 건 그래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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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5일 경성지방법원의 판결문. 피고인 목록에 '왕종순 당 16세(만 14세)'가 적혀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왕종순도 TF팀이 발굴해 2019년에야 뒤늦게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강원 철원 출신의 왕종순은 1920년 필운대 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철원의 유관순’이었다.

매일신보 등 당시 기록에 따르면 관할 종로경찰서에서 출동한 경찰들은 시위 학생 전원을 학교 기도실에 몰아넣은 뒤 한 명씩 불러 ‘주동자 색출’을 했다.

신문은 당시 상황을 “경찰이 선동 주모자를 극력 탐색 중이고 엄중히 취조를 계속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14~18세에 불과했던 여중·여고생들에게 각종 겁박과 위협을 가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왕종순의 나이는 고작 만 14세 5개월(음력 1905년 11월생)로 필운대 시위 참여자 중 최연소였다.

학생들은 단 한 명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경찰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거나 ‘특히 반항적인’ 학생 24명을 골라 경찰서로 연행했다. 왕종순이 이 중 하나였다.

당시 일제는 요주의 인물을 감시하기 위해 신상을 기록한 ‘감시대상인물카드’를 제작하곤 했는데, 왕종순은 ‘지문번호 98668|83898’로 기록했다. 사진 속 14살 왕종순의 눈빛은 매서웠다. 신장은 4척 6촌 3분(약 139㎝), 자그마한 체구에 굳게 다문 입술엔 조금 전까지 “대한 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치던 기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일제는 ‘어깨 부위에 천연두 흔적’ 등 그의 신체 특징도 적어놨다. 이름이나 외모를 바꿔도 추적이나 신원 확인을 용이하게 하려는 술수로, 어린 왕종순이 다음에 또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피고는 경성사립배화여학교 생도로서…조선독립만세를 고창(高昌)하여 독립운동에 찬동하는 의사를 표할 것을 기도하여…치안을 방해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일제 조선총독부 검사 요코타 요시타로(橫田義太郞)는 왕종순을 보안법과 조선형사령 위반 혐의로 기소했고, 경성지법 판사 미타무라 구니타로(三田村國太郞)는 그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어린 여중생임을 고려하면 이례적 중형이었다. 일제는 이에 더해 주모 학생들의 퇴학과 처벌 등을 학교에 압박했고, 배화학교 교장 스미스가 강제 퇴임 당하는 등 파장이 이어졌다.

여성이 교육받는 게 흔치 않던 시절, 왕종순처럼 학교에 다니던 여성들은 ‘신여성’ 축에 꼈다. 깨인 여성들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했다.

도쿄 아사히 신문은 1919년 3월1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위대를 이뤄 독립 만세를 부르며 거리행진을 하는 사진을 찍어 3월 5일자에 실었다. 일본 기자의 눈에도 여학생 시위대의 등장이 충격적이었던 셈인데, 이처럼 3·1 운동 과정에서 여성의 참여는 특히 도드라졌다.

1919년 3월 10~11일 강원 철원 읍내의 첫 만세 행렬을 주도한 이각경(당시 21세)이 그랬다. 철원은 강원도 만세운동의 거점이었다.

개성 호수돈여학교를 나온 이각경은 여학교 동창 김경순 등 700명의 주민과 함께 철원군청·철원역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친일파 박의병의 집으로 찾아가선 “독립 만세를 외쳐라” “숨겨 놓은 이완용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각경은 후에 자신의 재판에서 “나는 경성 조선독립 시위 운동에(을) 본받아 독립 시위운동의 방법으로 상술과 같이 떠들었다”고 주장했다. 일제 판사 앞에서 자신이 독립운동을 주도했음을 당당히 밝힌 셈이다.

법원은 그에게 징역 4개월 및 벌금 20원을 선고했다. 그가 징역형을 받은 사실은 1919년 10월 14일 독립신문에 ‘철원독립군의 판결’ 제하 기사로도 실렸다. ‘이각경 여사’는 1970년대 발간된 독립운동사에도 등장한다. 그가 철원 만세 운동에서 “선봉에서 활약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각경은 TF가 지난해에야 발굴해 제대로 알려질 수 있게 됐다. 철원 만세 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이들 중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은 경우 자체가 이소희 여사(2016년 대통령표창) 등 일부에 불과하다.

독립기념관 관계자는 “유공자 포상 추천을 하려면 독립운동 이후의 행적도 드러나야 하는데 여성 독립운동가는 남아있는 사료 자체가 많지 않다”면서 “동명이인인지 규명할 수 없는 자료도 상당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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