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나를 감싼 껍질을 가지고 놀았다” 현대미술가 이피, 첫 에세이 『이피세世』 출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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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아트스페이스3에서 열린 이피 작가의 '이피세' 출간 기념 전시. 사진 난다

사방이 흰 80평 전시 공간에 검은 창(窓)이 들어섰다. 금분(金粉)이 선을 이루고, 오색찬란한 색이 채워졌다. 천사 혹은 여성으로 보이는 신체가 검은 바탕을 빼곡하게 메웠다. 이피(이휘재, 44) 작가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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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 작가는 "『이피세世』의 표지 작업은 내가 생리통이 너무 심할 때 그렸다"며 "여성이 겪는 고통에 대해 그린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난다

지난 2월 한국인 최초로 미국 현대미술재단(FCA)의 도로시아 태닝상을 수상한 현대미술가 이피가 책을 냈다. “머릿속 지층을 독자들에게 보여드리게 되어 매우 떨린다.” 그는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아트스페이스3에서 열린 에세이 『이피세世』(난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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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 작가의 신간 『이피세世』표지. 사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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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세世』에 실린 작품 '천사의 내부'. 사진 이피 작가 홈페이지

시카고미술대에서 공부한 그는 1997년부터 한국과 미국 등을 오가며 90여 차례의 전시를 했다. 자신의 글을 소개하는 것은 처음이다. 제목 『이피세世』는 2019년 서울에서 열었던 개인전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의 이름을 땄다. 작가는 “당시 개인전에서 내 지층 사이사이에 살고있는 형상을 발굴해 자연사미술관처럼 전시했다. 이 책도 그 콘셉트와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회화, 퍼포먼스, 조각, 조소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이 여성으로서 감각한 세계를 표현해 왔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며 심한 인종차별을 받았다. 그때부터 나를 감싼 껍질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유학시절부터 나의 껍질을 가지고 노는 작업을 해 왔다.” 자궁과 갈비뼈를 연상시키는 모양의 작품 ‘천사의 내부’, 옷걸이에 걸린 장기들로 채운 작품 ‘내 몸을 바꾸기 위한 신체 진열대’는 그 작업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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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 작가의 '내 몸을 바꾸기 위한 신체 진열대'. 작가는 책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생각은 나의 회화의 계속되는 화두"라고 소개했다. 사진 이피 작가 홈페이지

특히 전통 불화와 합성 점토, 강화 플라스틱, 말린 오징어 등 비전통적 재료를 작업에 활용하는 점이 독특하다. 미국에서 작업을 시작했을 때 ‘불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받아 역으로 배워보길 결정했다. 만봉스님의 10번째 제자인 원미희에게 2010년부터 불화를 배웠다. “내 작품은 먼 과거와 먼 미래의 시간을 오간다고 생각한다. 시간 속으로 사라져가며 시간을 창조하는 나를 묘사하려 노력했고, 이 방식이 내 작업 속 시간을 다면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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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작가의 그림이 표지와 삽화로 실린 김혜순 시인의 『죽음의 트릴로지』표지. 사진 문학과지성사

시인 김혜순과 극작가 이강백의 딸이기도 한 그는 언제든 글을 쓰고 그림 그릴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김혜순의 시집에 삽화를 실었지만, 본격적으로 어머니의 시를 읽은 적은 없다. “거리를 두기 위해서”다. 다만 글쓰기를 당연한 일로 여겨 온 가풍은 그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피 작가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를 따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에게 글과 그림은 하나의 덩어리와도 같다”고 했다. 이어 “혜성이 지나갈 때 뒤에 꼬리가 남는 것처럼, 그림을 그리고 나서 늘 글이 잔여물처럼 남았다. 그 글들을 모아두었는데, 발표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책은 9년 전 출판사 난다의 대표 김민정 시인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 전시에서 짧은 작가의 말을 읽은 김 시인이 ‘이 작가는 자신의 전시와 작품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고, 이피 작가의 글들을 추렸다. 책에 실린 글들은 2010년부터 2022년 사이에 쓰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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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 작가가 2019년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 중 하나. '00001 동물계, 절지동물문, 거미강, 거미목, 염낭거미과, 19명의성인남녀를싣고가는거미소녀'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진 이피 작가 홈페이지

책에는 할머니의 부재와 작품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호스피스에 오래 계셨다. 아픈 사람들은 안에, 건강한 사람들은 밖에 있었다”며 당시 기억을 언급했다. “나는 작가로서 창문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삶과 죽음 사이의 창문을 만드는 것이 나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검은 바탕에 그려진 그의 그림이 창이기도 한 이유다.

책은 총 2부로 구성돼있다. 1부는 예술가 이피의 내면을 기록한 에세이, 2부는 자신의 작품들에 보내는 편지다. 글과 함께 볼 수 있도록 도판 113점이 함께 실렸다.

이 중 책으로는 자세히 들여다보기 어려운 대형 작품들을 기자간담회와 북토크가 열린 13일 하루만 아트스페이스3 갤러리에서 전시한다. 표지에 실린 ‘천사의 내부’(2016), 높이 2.2m 너비 5.8m인 병풍에 그린 ‘내 몸을 바꾸기 위한 신체 진열대’(2017) 등 9점과 책에 실리지 않은 ‘찬양하라! 지금까지 내가 먹은 것들’(2021)까지 10점이 전시에 나왔다. 책은 14일 출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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