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한 사람도 잊어선 안 돼"…3595명 '무명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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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전 광복은 수많은 순국 선열의 희생을 통해 현실이 됐다. 이 중에는 백범 김구나 도마 안중근처럼 널리 추앙받지는 못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 없이 일제에 저항해온 숨겨진 독립운동가가 더 많지만, 대부분은 기록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중앙일보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독립기념관 산하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이 찾아낸 ‘잊힌 독립 영웅’의 흔적을 조명했다. 지난 2018년 발족한 TF팀이 지금까지 발굴한 독립운동가는 모두 3595명. 존재조차 몰랐던 영웅을 함께 기억함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빛을 찾는 길을 따라가 본다.

“역사의 중심에서 벗어난 데다 그 주변부에서도 잊힌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내는 게 우리의 일입니다.”

지난 7일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만난 정욱재 독립운동가 자료발굴 TF팀 팀장은 "후손도, 기록도 알려지지 분들의 이름을 역사에 되돌려놓는 게 우리의 사명"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사무실에서는 정 팀장을 비롯한 7명의 연구원들이 각자 모니터 앞에서 일제 강점기의 수형기록, 판결문, 당시 신문 기사 등 자료를 교차 확인하며 ‘잊힌 영웅’을 발굴하기 위해 이날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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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산하 독립운동가 자료발굴 TF팀의 정욱재 팀장이 11일 충북 천안시 독립기념관 사무실에서 일제 비밀경찰 조직인 특별고등경찰이 발간한 ‘특고월보’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김성룡 기자.

2018년 출범한 TF팀은 지금까지 기존의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누락된 독립운동가 3595명의 이름을 찾아냈다. 이 중 777명은 국가 포상으로 이어졌다. 지난 13일 광복 8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부가 포상했다고 밝힌 독립유공자 311명 중에도 TF팀이 추천한 독립운동가 81명이 포함됐다. 이중에는 1932년 일제에 쫓기던 김구 선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의 피신을 도운 미국인 제랄딘 피치 여사와 1920년대 초 중국 만주에서 광정단과 북로군정서에 소속돼 일본 경찰과 전투하고 군자금 모집을 하다 체포돼 징역 15년을 받은 김창준 선생이 있다. 이들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는데, 독립장 서훈은 5년 만이다.

TF팀의 연구원들은 국내 항일 운동, 학생 운동, 임시 정부, 의열 투쟁, 만주·일본·중국·노령(연해주), 외국인 등 분야를 나눠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특히 역점을 두는 건 후손과 이름을 확인하기조차 쉽지 않은 이들이다. 정 팀장은 “돈도 권력도 없이 나라를 위해 싸운 분들에게 유일한 자산인 명예를 되돌려주고자 한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 발굴의 출발점은 대개 옛 자료 속에 묻혀 있는 기록 한 줄이다. 일본 내무성 보안과가 작성한 ‘특고월보’, '사상월보', 일본에 있던 조선인의 경찰 기록을 망라한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 등 일제의 자료도 주요한 1차 자료가 된다. 예를 들어 ‘○○○,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같은 짧은 문장이 단서가 될 수 있다. 단서를 잡으면 관련 인물·사건·지역을 따라가고,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이름도 건져 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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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산하 독립운동가 자료발굴 TF팀 정욱재 팀장이 11일 충북 천안시 독립기념관 사무실에서 일제 비밀경찰 조직인 특별고등경찰이 발간한 ‘특고월보’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김성룡 기자.

이병례 TF팀 연구원은 “자료를 읽다 보면 연관된 다른 인물들도 눈에 띈다"며 "예를 들어 A씨를 추적하기 위해 신문 기사를 읽다보면 함께 구속된 B씨가 언급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그 사람을 다시 뒤져보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퍼즐을 맞추듯 파생된 인물과 사건을 연이어 추적하며 방대한 재판 자료, 신문 기사 등을 교차 검증한다.

이 연구원은 "옛날엔 자료 한 건만 있어도 독립운동가 여러 명의 이름이 줄줄이 나왔지만, 이미 상당수의 존재가 확인된 만큼 이제는 사실상 '이삭줍기'를 하듯 빠트린 이름이 없는지 다시 훑는 작업에 가깝다"라고 설명했다. 독립운동에 종사한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국가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게 이들의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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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산하 독립운동가 자료발굴 TF팀 이병례 연구원이 11일 충북 천안시 독립기념관 사무실에서 이천홍 독립운동가의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김성룡 기자.

발굴 작업은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에 비유된다. 일제 기록이 기본이 되는 데다 창씨 개명으로 본명이 누락돼 추적이 벽에 부딪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연구원들은 그냥 포기하지 않고 지방자치단체에 제적부를 요청하거나 직접 발로 뛰며 자료를 찾기도 한다. 지난달 서산의 한 면사무소에서도 이런 현장 조사를 통해 38명의 독립운동가를 발굴했다.

TF팀의 발굴 범위는 조선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내외에서 조선인 동지와 함께 투쟁한 일본인을 비롯해 해외의 항일 투쟁 거점에서 활동하거나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한 이들은 국적을 따지지 않고 연구 대상이 된다. 다만 외국인의 자료는 각국에 분산돼 있어 발굴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독립운동 지원 외국인을 연구하고 있는 김철영 TF팀 연구원은 “외국인은 당시 연령이나 출생지 등 인적 정보를 찾는 게 제한적이라 첫발을 떼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은 다양한 이유로 조선을 도왔지만, 주로 사회주의 계열의 국제 노동 운동 연대 차원의 활동이 많아 해방 후 이념 문제로 소외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실제 그간 사회주의 계열이거나 북한과 연관된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포상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정부 교체에 따라 여파가 있었던 것도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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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산하 독립운동가 자료발굴 TF팀 김도희 연구원이 11일 충북 천안시 독립기념관 서고에서 최연소 여성 독립운동가 왕종순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고 있다. 김성룡 기자.

후손이 없는 경우도 사각지대다. 이 연구원은 “후손이 있는 분들은 그들이 신청을 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우리가 먼저 찾아나서지 않으면 영영 발굴되지 않을 것”이라며 “발굴 후 포상이 이뤄져 뒤늦게 후손이 존재를 알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때의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TF팀의 활동은 대부분 포상 절차로 연결되지만, 연구원들은 포상 여부가 독립 운동의 전부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정 팀장은 "포상 실적에 치중하다 보면 실제 활동과 별개로 포상의 기준에 맞지 않는 이들이 배제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며 "독립 운동을 했다는 기록 자체는 포상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존중받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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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충북 천안시 독립기념관 서고의 최연소 여성 독립운동가 왕종순에 관한 자료. 김성룡 기자.

TF팀의 노력이 빛을 발하려면 제도적 지원도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8년째 이어져 온 TF팀이지만 기간제 연구원으로 이뤄진 한시 조직인 데다 사업비 예산도 매년 줄고 있다.

독립운동가 자료발굴 TF팀의 하루는 그렇게 흐른다. 흩어진 기록을 모아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이름을 되살리는 사람들. 그들이 발견한 이름은 잊혔던 한 개인의 삶이자, 우리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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