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삼수 끝 구한 '안중근 녹죽'도 기탁…&a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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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유묵 '녹죽(綠竹)' 환수를 주도한 이상현 태인 대표가 14일 오전 덕수궁 돈덕전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14일 오전 시민들은 장맛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울 덕수궁 돈덕전을 찾았다. 국가유산청이 주최한 광복 80주년 특별전시 ‘빛을 담은 항일유산’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머리칼이 희끗희끗 센 관람객의 시선이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유묵 ‘녹죽’(綠竹·푸른 대나무)에 오래 머물렀다.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안 의사가 사형을 앞두고 남긴 녹죽은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상현 태인 대표가 능숙한 도슨트처럼 어르신에게 녹죽의 특징을 설명했다. 옆에 자리한 안 의사의 또 다른 유묵 ‘일통청화공’(日通淸話公)은 ‘날마다 맑고 깨끗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란 뜻이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던 어르신이 ‘그런데 댁은 뉘신지…’하는 표정을 짓자, 이 대표는 “사실 저희 가문이 두 유묵을 이번 전시에 기탁했다”며 멋쩍게 웃었다. “독점이 아니라 나누고 같이 향유할 때 문화유산이 가진 가치와 이야기가 더 커진다”고 말하는 이 대표를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만났다.
“녹(綠)은 순수한 초심, 죽(竹)은 꺾이지 않는 마음”
이 대표는 흔히 말하는 재벌 3세다. 고(故)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외손자다. 문화유산을 각별히 사랑하는 수집가이기도 하다.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를 맡은 이 대표는 지난 4월 어머니 구혜정 여사와 함께 서울옥션에서 녹죽을 세 번의 시도 끝에 품에 안았다. 낙찰가는 9억4000만원. 일본 소장자가 갖고 있던 유묵이라 광복 80주년을 맞아 꼭 환수하고 싶었다고 한다.
2017년엔 아버지 이인정 아시아산악연맹 회장과 함께 일통청화공도 낙찰받았다. 당시 일통청화공은 미술품 시장에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한다. 뤼순 감옥 간수 과장 기요타(淸田)에게 써준 글씨라 꺼림칙하다는 감정이 작용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일본인 간수마저 감화한 안 의사의 평화 사상과 인품이 드러난 작품이라고 판단하고 부친을 설득했다. 그렇게 품에 안은 일통청화공은 2022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광복 80주년 특별전시 '빛을 담은 항일유산'에서 처음 공개된 안중근 의사의 유묵 '녹죽(綠竹)'. 오언시집 '추구(推句)'의 “푸른 대나무는 군자의 절개요, 푸른 소나무는 장부의 마음(綠竹君子節 靑松丈夫心)”구절에서 따온 단어다. 장진영 기자
그런데 이 대표는 어렵게 얻은 두 유묵을 모두 기탁하기로 결정했다. 일통청화공은 2017년 6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맡겼고, 녹죽도 전시를 마친 뒤에 국가 기관에 기탁할 예정이다. 녹죽은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안 의사 관련 연주회 ‘뮤지컬 영웅, 국립합창단과 만나다’에서도 공개될 예정이다. 이 대표는 “문화유산은 특정 개인과 가족의 자산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많은 시민이 실물을 직접 보고 학술 연구도 이뤄져야 울림이 커진다”고 했다.
그의 소장품 공개는 일회성 활동이 아니다. 9살 때부터 우표를 수집해온 이 대표는 2020년 국립국악박물관에 남·북한 전통 음악 우표 370장을 기증했다. 지난 3월엔 안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함께 등장하는 초상 엽서를, 지난해 7월에는 일본 제일은행의 지폐 12종을 최초로 공개했다. 안 의사는 이토를 저격한 뒤 그가 저지른 15개 죄악 중 하나로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를 지목했다.

고(故)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외손자인 이상현 태인 대표는 "문화유산은 독점할 때가 아니라 나눌 때 가치가 더 커진다"고 강조했다. 장진영 기자
이런 그의 나라 사랑은 가문사(史)와 무관치 않다. 이 대표는 2007년 선조의 기록을 찾던 도중 증조할아버지였던 이희원 선생이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정부에 올리고, 흥사단을 지원하는 등 애국·독립 활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대표는 “역사를 공부하고 사회공헌 활동을 할수록 깨닫는 게 있다면, 개인이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면서 행동할 때 추후 나에게도 혜택이 되돌아온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앞으로 잊힌 독립영웅의 흔적을 찾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일 예정이다. 장기적으론 기탁 문화를 활성화하고, 훈장 박물관을 건립하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이 대표는 “이번에 공개된 녹죽의 각 글씨에는 순수한 초심(녹·綠), 꺾이지 않는 마음(죽·竹)이라는 뜻이 담겼다고 생각한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계신 시민들께 이런 메시지가 닿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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