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단독]"아파도 병원 못가요"…무등록 '유령 이주아동&…

본문

6살 하늘(가명)이는 아파도 병원에 잘 못 간다. 감기에 걸려 집 근처 소아과라도 한번 가면 진료비 7~8만원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다칠까봐 주로 집안에서만 놀고 있다. 베트남인 엄마와 한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하늘이는 부모가 이혼하면서 출생 신고를 못한 미등록 아동이다. 엄마가 재혼한 뒤 숨지면서 새 아빠와 살지만 친생자가 아니어서 한국에선 출생 신고가 불가능하다. 뒤늦게 베트남 현지 외할머니와 연락이 닿았지만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1년 넘도록 현지에서도 출생 신고를 못해 국제 미아가 됐다.

17554619930802.jpg

지난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에 있는 사단법인 '아이들세상 함박웃음'에서 찍은 가을이의 사진. 전율 기자

의료기관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지방자치단체에 알리는 출생통보제가 지난해 7월 시행됐지만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인 ‘그림자 아이들’이 수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인 부모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대표적이다. 가족관계등록법상 출생통보 대상은 ‘국민’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법무부에 따르면 임시신생아번호로만 관리되는 아이 중 보호자가 외국인인 아동은 지난 4월 기준 5183명. 과거 집계에서 누락된 아이들까지 고려하면 전체 숫자는 2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불법 체류 등 부모 체류 자격 또는 개인적 사유로 출생 신고를 하지 못한 외국인 아이 수만 명이 서류상으론 ‘없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출생 신고를 못한 아이들은 신분을 증명할 외국인 등록증도 발급 받지 못하고 보험 가입도 안 돼 아플 경우 치료비를 감당하기도 어렵다. 학교를 다니기도 어렵고 자기 이름으로 휴대전화나 통장을 만들 수도 없다. 2019년 2월 830g의 미숙아로 태어난 가을(가명)이는 태어나는 과정에서 생긴 뇌출혈, 비뇨기 질환과 장파열 등으로 외과 수술이 필요했지만 2년 넘게 제대로 된 진료조차 받지 못했다. 가을이를 낳은 엄마가 “안 태어난 걸로 여기겠다”며 출생 신고를 하지 않고 본국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은 언제든 학대나 범죄의 표적이 될 위험이 있다. 현재도 5183명의 아이들 중 250명은 생사 확인조차 불가한 ‘행방 불명’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예 보호자와 아동의 인적 사항을 특정하기도 어려운 49명을 더하면 사라진 아이들은 300명에 달한다. 임시신생아번호로만 존재하다가 사망한 아이도 49명이다.

1755461993308.jpg

지난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에 있는 사단법인 '아이들세상 함박웃음'에서 찍은 가을이의 사진. 전율 기자

전문가들은 출생 등록만으로도 이 아이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가을이는 사단법인 ‘아이들세상 함박웃음’ 오창종 대표의 도움으로 대사관 등 여러 기관에 지원을 요청했고, 수소문을 통해 한국에 사는 외할머니를 찾아 태어난지 2년 만인 2021년 극적으로 출생 등록을 하고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전까지 코 밑에 호스를 갖다 댄 채 무표정하게 누워있던 가을이는 이젠 찜질방에 가는 일요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노래방에서 두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활짝 웃으며 동요를 부를 수 있게 됐다. 지난해 장애인 등록을 하고 재활 치료를 시작했고 내년엔 초등학교에도 입학할 예정이다.

가을이가 노는 영상을 보여주던 오창종 대표는 “어딘가 구석에 움츠려 있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이지만, 출생 등록만 해도 이렇게 밝아지고 당당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가을이는 여러 기관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출생 등록을 할 수 있었던, 아주 희귀하고 운이 좋은 케이스다”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체류 자격 획득이나 국적 선택은 나중에 자란 뒤 노력으로 할 수 있지만 신생아 생명·안전 등 최소한 인권을 보호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편적 출생등록제’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17554619935291.jpg

출생 신고가 되지 않은 아이를 안고 병원 앞을 서성이는 보호자를 표현한 이미지. 일러스트 챗GPT

지난달 17일엔 출생통보제 시행 1주년을 맞아 임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세이브더칠드런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가족관계등록법 및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한다고 밝혔다. 부모의 법적 지위나 출신과 관계없이 모든 아동의 출생 등록을 보장하는 것이 골자다. 국회 입법조사처 역시 지난해 보고서를 통해 “주요 선진국에서는 출생 아동의 내·외국인 여부를 불문하고 출생등록을 허용하고 있다. 출생 등록될 권리는 헌법재판소와 UN에서 인정된 인류 보편의 인권이므로 아동 출생등록은 국적 문제 등과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일각에선 외국인 부모를 둔 아동의 출생 등록이 부모의 불법 체류나 출입국법 위반 등 문제와 연결될 수 있고 출생 등록으로 인한 국적 부여나 복지혜택 확대 등은 사회·경제적 부담을 유발할 우려가 있어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53,143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