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국민 밥솥·선풍기 옛말...위기의 중견 가전업체, 부활의 돌파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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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밥 이미지 촬영. 20191024 우상조 기자

‘국민 밥솥’, ‘국민 김치냉장고’, ‘국민 선풍기’.

한때 집집마다 한 대씩은 꼭 있는 살림 필수품이었고, 삼성·LG 같은 대기업조차 긴장하게 만들었던 중견 가전업체들의 인기 제품들이다. 결혼 혼수 목록 1순위로 불티나게 팔려나가던 시절 “밥솥은 쿠쿠, 김치냉장고는 딤채, 선풍기는 신일”이라는 공식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1990~2000년대 열풍을 이끌었던 이 ‘국민 가전’은 인구 구조 변화와 달라진 생활습관, 글로벌 기업의 거센 추격 속에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즉석밥 시장에 치인 밥솥

대표적인 사례가 밥솥이다. 쿠쿠(점유율 1위)와 쿠첸(2위)은 여전히 국내 밥솥 시장을 장악하고 있지만, 양사의 연간 밥솥 판매 실적은 최근 6년간 6000억원대에서 제자리걸음하고 있다. 인구 감소와 더불어 1인 가구 비중 증가로 식생활이 변하면서 밥을 직접 지어 먹는 이들이 줄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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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영 디자이너

통계청의 양곡소비량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1인당 쌀 소비량(즉석밥 제외)은 55.8kg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반면 즉석밥 시장 규모는 2015년 2200억원에서 지난해 5000억원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1분 30초’면 완성되는 즉석밥의 편리함에 밥솥의 존재감이 갈수록 옅어지고 있다.

김치냉장고 강자 위니아(전 위니아딤채)와 국내 최초로 선풍기를 제작해 명성을 떨쳤던 신일전자도 위기를 맞았다. 냉장고·선풍기 수요는 한정적인데 대기업을 비롯해 중소형 가전 기업들이 제품군을 나날이 확대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위니아는 무리한 사업 다각화까지 더해져 파산 수순을 밟고 있다.

로청 시장 中 장악…한국서 줄줄이 신제품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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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기 다이 드리미 한국·일본·호주 지역 총괄 이사가 21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드리미 2025 신제품 런칭쇼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설상가상으로 중국 기업들은 빠르게 한국 시장을 파고들고 있다. 앞서 신일전자는 제품 다각화를 외치며 지난해 인공지능(AI) 기반 로봇청소기 ‘로보웨디’를 첫 출시했다. 가격은 129만원으로 삼성전자나 LG전자, 중국 로보락의 주력 제품(150만~180만원) 저렴했다. 하지만 로보락(45%)·드리미(7%)·에코백스(5%) 등 기술력을 앞세워 국내 로청 시장을 꽉 잡고 있던 중국 기업들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한국 내 행보도 한층 더 공격적으로 변하고 있다. 샤오미는 지난 6월 서울 여의도에 첫 공식 오프라인 매장 ‘샤오미 스토어’를 열고 한국 상륙을 본격화했고, 지난 20·21일엔 중국 가전기업 모바와 드리미가 각각 한국에서 로봇청소기 신제품을 발표했다. 모바 관계자는 지난 20일 기자간담회에서 “백색가전은 한국이 우수할 수 있어도 로봇은 기술 장벽이 굉장히 높다”며 “삼성·LG도 쉽지 않은데 중견 기업들은 사실상 따라잡기 어려운 분야”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중견 가전업체의 위기는 단순한 기업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의 주요 공장이 국내에 자리 잡고 있어 고용은 물론 지역 경제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유위니아가 터를 잡고 있던 광주 지역에는 그룹 계열사 협력업체가 150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당장 위니아가 올해 4월 김치냉장고 공장 문을 완전히 닫으면서 생산인력 150명이 직장을 잃었다. 쿠쿠는 경남 양산과 경기 시흥, 쿠첸과 신일전자는 충남 천안에 공장을 두고 있다.

쿠쿠, 정수기 렌탈 사업으로 활로 모색 

기업들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핵심은 다양화, 그리고 틈새시장 공략이다. 선두에 서 있는 건 쿠쿠다. 쿠쿠는 일찍이 사업 다각화에 나섰다. 2017년 정수기·공기청정기 등 생활가전 판매·렌탈 사업을 ‘쿠쿠홈시스’로 분사시킨 뒤 지난해 처음으로 매출 1조원을 넘어섰다. 현재 밥솥 판매 매출은 전체 매출의 25~30%에 불과하다. 주방제품에선 음식물처리기와 인덕션, 식기세척기로 제품 범위를 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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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영 디자이너

2019년부터 2023년까지 5년 연속 내리 적자를 기록하던 쿠첸은 ‘밥맛’에 집중했다. 코로나19 시기, 건강식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걸 포착, 2021년 ‘121 밥솥’을 내놓았던 게 전환점이 됐다. 121도 초고온으로 불리는 과정 없이 잡곡 취사가 가능하고 백미처럼 부드러운 식감을 구현할 수 있게 되자 출시 5개월 만에 7만대 판매하는 기록을 세웠다. 21일 ‘123 밥솥’을 새롭게 출시하고 기자간담회를 연 쿠첸은 “121 밥솥보다 높은 2.2기압으로 취사온도도 123도에 달해 취사시간이 30% 빨라졌다”고 밝혔다. 박재순 쿠첸 대표는 “작년에 소폭 흑자를 냈다. 올해는 신제품 판매 성과가 받쳐주면 흑자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견 기업들이 주춤한 사이 중소형 가전의 틈새시장을 파고들어 새롭게 떠오르는 신생 기업도 있다. 예컨대 현재 음식물처리기 시장 점유율 1위는 2023년 9월 처음 시장에 뛰어든 스타트업 앳홈의 가전브랜드 미닉스다. 앳홈은 음처기 판매 호조세에 힘입어 지난해 연 매출 1150억원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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