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소년중앙]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이 알려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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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함부로 못 본 실록 
현대 우리가 볼 수 있게 되기까지  

흔히 조선을 '기록의 나라'라고 하죠. 그 이유는 국가 회의록이나 관청의 업무일지, 행사 등을 다양한 기록물로 남기고 보존해온 전통 때문입니다.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인 승정원의 기록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왕실 행사 준비·진행·결과를 상세히 기록한 『조선왕조 의궤(朝鮮王朝 儀軌)』, 국가에서 관리하는 왕의 친인척에 관한 인적 사항을 조사한 『선원록(璿源錄)』 등이 대표적이죠. 특히 『조선왕조실록』은 국정 운영, 경제 상황, 외적의 침략 등은 물론, 왕이 애지중지했던 반려동물에 대한 이야기 등 472년간 일어난 조선 왕조의 대소사가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왜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수백 년 동안 후대에 전할 수 있었던 걸까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을 찾아 알아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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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준·고일재·변우빈(왼쪽부터) 학생기자가 『조선왕조실록』의 제작 과정과 보관법을 알아봤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들고 있는 건 『중종실록』의 일부.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제1대 태조부터 제25대 철종까지 472년(1392~1863)간 조선의 정치·경제·외교·군사·법률·산업·예술·종교 등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하여 편찬한 공식적인 국가 기록이에요. 조선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문치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왕조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기록을 중요하게 여겼어요. 따라서 왕이 자신의 언행을 경계하여 선정을 베풀고, 후대에 역사적 교훈도 남길 수 있도록 실록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죠.

1973년 국보 제151호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 특정 시대의 중요한 사회·문화적 변화를 보여주고, 인류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과 세계사·문화에서 중요한 장소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음을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됐어요.

태조~철종 『조선왕조실록』, 어떻게 만들었을까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에는 『조선왕조실록』의 제작 및 관리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이하 조선왕조실록박물관)이 있어요. 2023년 11월 개관해 상설전시·기획전시·어린이박물관 등 다양한 콘텐트로 『조선왕조실록』의 가치를 알리는 이곳에서 고일재·변우빈·이서준 학생기자가 정홍일 학예연구사를 만났어요. 일재 학생기자가 "왜 강원도 평창에 조선왕조실록박물관을 설립했는지" 궁금해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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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일제강점기의 여파로 현재 75권만 남아있다. 사진은 오대산사고본 『중종실록』.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사고(史庫)란 고려와 조선에서 국가의 중요 서적을 소장하고 보존·관리하던 서고를 말해요. 조선시대 기준 사고는 중앙에 있던 역사 편찬 기관인 춘추관에 설치된 사고와 지방에 설치된 외사고로 구분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은 국왕이 승하하면 해당 왕대의 실록을 제작하면서 25대 동안 이어진 기록인데요. 전란·화재 등 불의의 사고로 실록이 전소되는 걸 막기 위해 복본을 만들었고, 전국의 여러 외사고에 보관했어요. 그중 한 곳이 오대산사고죠. 조선왕조실록박물관으로부터 약 8km 떨어진 곳에 지금도 오대산사고가 남아있어요."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은 어떤 과정을 거쳐 제작했으며, 오대산사고에서는 어떻게 실록을 관리했을까요. 그 과정을 조선왕조실록박물관 상설전시와 특별전 '오대산사고(史庫) 가는 길'에서 살펴볼 수 있어요. 먼저 실록 제작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정 학예사와 함께 상설전시실로 향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크게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제작됐어요. 첫 번째,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해당 왕의 사후에 편찬했죠. 두 번째, 사관에게는 사실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는 직필(直筆)의 권한을 주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 사관의 기록과 완성된 실록은 왕이라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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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한 실록은 보자기에 싸서 상자에 보관했다. 사진은 『성종실록』을 보관한 상자.

『조선왕조실록』의 제작은 국왕이 승하하면 해당 왕대의 실록을 제작하기 위해 실록청이란 임시 관청을 설립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실록 편찬을 총괄하는 총재관은 대신급의 고관이, 실록 원고를 저술·편집하는 관원들은 학술 기관인 홍문관(弘文館)과 국왕의 말·명령을 문서로 작성하던 예문관(藝文館)의 사관들이 임명됐죠. 이렇게 실록청이 구성되면 사관이 왕 옆에서 매일 적은 사초, 『승정원일기』, 중앙·지방 관청 기록 등을 참고해 실록을 작성했어요. 그 결과 실록에는 왕실의 일상부터 조정에서 논의된 주요 안건, 관료의 상소, 외국과의 교류, 자연재해, 백성들의 풍속과 생활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겼죠.

실록 편찬에 사관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관 선발 절차는 매우 까다로웠어요. 기존에 근무 중이던 사관이 후보자를 추천하는 자천제로 운영됐는데, 자천제로 물색한 후보자는 사관 역임자나 홍문관·예문관 고위 관리들이 심의한 뒤, 『자치통감강목』 『춘추좌전』 『송원절요』 중 1책으로 강독 시험을 실시했죠.

전시실에서는 『자치통감강목』 『춘추좌전』 『송원절요』를 실제로 살펴볼 수 있었는데요. 서준 학생기자가 "왜 이 3권의 책으로 사관 선발 시험을 봤는지 궁금해요"라고 말했죠. "이 3권은 중국의 역사서예요. 사관이 되려면 재(才)·학(學)·식(識)의 기본 소양을 갖춰야 해요. 재는 역사적 서술 능력, 학은 유교 경전과 사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 식은 상황을 두루 살피는 통찰력을 의미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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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일(맨 오른쪽) 학예사가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설명했다.

이외에도 사관은 외압을 거부할 수 있는 강직한 성품을 지녀야 했으며, 출신 가문에 문제가 없어야 했어요. 이렇게 사관 임명 절차가 까다로웠기 때문에 『승정원일기』 경종 2년 3월 12일 기록에 따르면 결원이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후임자 임명이 어려웠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후대에 남기는 공식 기록이었기 때문에 작성 과정도 신중을 기했어요. 처음 작성한 초초(初草), 초초를 보충 수정해 다시 쓴 중초(中草), 중초를 보충한 정초(正草) 세 단계로 실록 원고를 작성한 뒤 인쇄했죠.

"실록의 인쇄 방식은 시기에 따라 달라졌는데, 이를 통해 당시 조선의 사정도 간접적으로 가늠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조선이 건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인 태조·정종·태종실록은 필사본으로 제작했고, 『세종실록』부터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명종실록』은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금속활자로 인쇄했죠. 임진왜란으로 인해 금속활자들이 사라져 새로 만들기 어려운 시기일 때는 나무로 만든 목활자로 실록을 인쇄했어요. 선조·인조·효종실록이 이런 사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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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우빈 학생기자가 사관의 역할부터 실록청의 실록 발행까지 『조선왕조실록』이 간행되는 과정을 살폈다.

완성된 실록은 보자기에 싸서 상자에 보관한 뒤, 한양의 춘추관사고와 지방 외사고에 분산해 안전하게 봉안했어요. 편찬을 마친 실록청은 편찬 사업 과정을 담은 『실록청의궤』와 실록청 관원의 명단을 수록한 『제명기』를 제작했죠. 정말 '기록의 나라'답지 않나요.

『조선왕조실록』에는 당대에 여러 분야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어요. 예를 들어 1592년(선조 25) 선조의 파천(播遷) 사실을 적은 『선조실록』에는 임진왜란 당시 참담했던 상황이 기록돼 있죠.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4월 29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 장군이 참패하자 조정에서는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는 파천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결국 선조는 4월 30일 새벽 왕실의 안위를 위해 피란을 결정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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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는 국정 운영부터 왕의 사생활까지 다양한 정보가 담겨있다. 사진은 『선조실록』.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새벽에 상(임금)이 인정전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점심을 벽제관(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부근 객사)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됐으나 동궁(왕세자)은 반찬도 없었다. 병조판서 김응남이 흙탕물 속을 분주히 뛰어다녔으나 여전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고, 경기 관찰사 권징은 무릎을 끼고 앉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1592) 4월 30일

우빈 학생기자가 "정사 외에 재미있거나 특별한 이야기도 남아있다고 들었어요"라고 말했죠. 국가의 대소사 외에도 평범한 사람으로서 왕의 모습 또한 기록됐어요. 『성종실록』 권86에 실린 성종의 남다른 동물 사랑이 한 예죠. 성종은 동물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 앵무새·백조·공작·노루·사슴·매 등 많은 동물을 길렀는데, 그중 일본으로부터 선물 받은 원숭이에 대한 일화예요. 성종이 한겨울을 맞아 원숭이가 추위에 떨 것을 걱정하여 집과 옷을 내리려 했으나, 신하들이 원숭이에게 지어줄 옷 한 벌로 한 명의 백성을 추위에 떨지 않게 할 수 있다고 반대했죠. 그러자 성종은 옷이 아니라 사슴가죽이었을 뿐이라며 둘러댔다는 내용이죠.

깊은 산중의 외사고, 어떻게 관리했을까  

이렇게 우리가 조선시대에 관한 여러 기록을 쉽게 알 수 있는 건 외사고의 역할이 커요. 한양의 춘추관사고에 보관했던 실록은 전란·화재 등으로 대부분이 소실됐지만, 지방 외사고에 있던 실록과 장서들은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온전하게 보전됐기 때문이죠. 조선이 겪은 가장 큰 국란 중 하나였던 임진왜란 당시에도 전주사고본이 유일하게 남아 『조선왕조실록』이 후대에 무사히 전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조선왕조는 5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가진 만큼, 외사고의 위치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어요.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사고 외에 비교적 접근이 쉬운 충주·전주·성주에 외사고를 설치했어요.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전주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소실되자, 조정은 서둘러 화재나 또다른 전란에 대비해 실록의 복본을 제작하고 외사고를 접근이 어려운 오대산(강원도 평창), 태백산(경상도 봉화), 묘향산(평안도 영변), 마니산(강화도) 등으로 옮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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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각 현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외사고 건물은 사각 혹은 실록각이라 불렀다.

이러한 노력에도 이괄의 난(1624)과 병자호란(1636)을 거치며 춘추관사고와 마니산사고가 피해를 보자, 조정은 마니산사고를 정족산(강화도)로 옮겼어요. 또 후금(청)과 관계가 나빠질 것을 우려해 북쪽에 있던 묘향산사고를 적상산(전라도 무주)로 변경했죠. 그 결과 조선 후기에는 춘추관사고·정족산사고·태백산사고·적상산사고·오대산사고 등 5대 사고 체계가 300년이 넘는 긴 시간 안정적으로 유지됐어요.

외사고의 전반적인 운영 방식은 오대산사고의 건물·서적 관리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소개하는 특별전 '오대산사고 가는 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어요.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전란 중 유일하게 화를 피한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실록 복인(復印)을 추진했어요. 1606년(선조 39년) 지어진 오대산사고는 복인된 실록을 중점적으로 보관하는 사각(史閣)과 왕실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寶閣)으로 구성돼 있는데, 한국전쟁으로 소실돼 터만 남아있었으나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92년 사각과 선원보각이 복원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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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박물관 특별전 '오대산사고 가는 길'은 오대산사고의 운영 및 관리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다.

조선 후기 외사고 관리는 크게 사고 건물 관리와 소장 서적 관리로 나뉘어요. 오대산사고를 비롯한 외사고의 건물과 서적 관리 책임은 조정에 있어, 유사시 지방관·관찰사·춘추관을 거쳐 국왕에게 보고했죠. 오대산사고 관리는 강원도관찰사와 강릉부사의 지휘 아래 사고 관리 실무를 담당했던 참봉, 건물을 관리하는 승려인 수직승도, 사고를 지키는 군사인 수호군 등이 맡았어요.

오대산사고 참봉은 강릉 유생들 중 학식과 덕망을 갖춘 사람 2명을 선발했어요. 전시실에서 강릉부사가 유학 이원혁을 오대산사고 참봉으로 임명하는 문서인 '이원혁 차첩'을 보니 소임이 가볍지 않으니 부임하여 임무를 살피라는 내용이었죠. 사고 건물을 점검하고 상시적 순찰을 통해 서책의 도난을 막는 수직승도는 인근 사찰에서 승려들을 차출했는데요. 오대산사고의 경우 인근의 월정사를 수호 사찰로 지정하고 강릉과 양양에서 승려 40~60명을 뽑았죠.

오대산사고가 있던 오대산 일대를 순찰한 수호군은 인근 백성 중에서 선발했어요. 오대산 전역에서 빈번했던 화전(火田)으로 사고는 항상 화재 위험에 노출돼 있었기에, 수호군의 주된 임무는 화재 예방이었죠. 그 결과 오대산사고가 존속하는 동안 화재로 인한 큰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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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나라' 조선은 왕의 초상인 어진도 남겼다. 태조의 어진을 살펴본 고일재 학생기자.

서적과 같은 지류 문화재는 불과 습기에 취약하기에, 외사고에는 화재 예방을 위해 온돌을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습기로 인한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책을 기름을 먹인 종이로 싸서 충해 예방과 방습 효과가 있는 천궁(川芎)·창포(菖蒲)가루와 함께 궤(櫃)에 넣고, 조정에서 주기적으로 사관을 파견해 책을 꺼내 바람에 말리는 포쇄를 시행했어요.

"예문관·춘추관의 소관 업무를 정리한 책인 『한원고사』(1678)에 따르면 포쇄는 2~3년에 한 번씩 조정에서 사관을 파견해 봄이나 가을에 이루어졌어요. 포쇄는 보통 하루면 끝났지만, 서적이 많으면 3일에 걸쳐 진행하기도 했죠. 포쇄가 끝나면 사관은 사고에 보관 중이던 실록과 일반 서적을 구분해 현황을 기록한 『실록포쇄형지안』을 남겼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1831년 사관 서염순이 작성한 『실록포쇄형지안』을 살펴봤죠.

한양에서 외사고까지 포쇄를 오는 것은 사관에게는 큰 영광이었기에, 그 과정과 소회도 기록했습니다. 조선 후기 문신 번암 체제공(1720~1799)은 1749년 오대산사고 포쇄를 다녀와 『번암집』에 그에 대한 감회를 적은 '사각포쇄'라는 시를 남겼어요. 당시 체제공은 포쇄를 다녀오는 길에 풍악산(금강산)을 들렀는데요. 그처럼 오대산사고 포쇄를 다녀오면서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지역 명소를 둘러보는 사례가 많았죠. 조선 후기 학자이자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도 1823년 오대산사고 포쇄 여정을 시문집으로 남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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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사고가 표시된 조선시대 지도인 '동여도'를 살펴본 소중 학생기자단.

일재 학생기자가 "현대에도 포쇄와 비슷한 절차가 이뤄지나요"라고 질문했죠. "포쇄는 외사고가 습기에 취약한 구조였기 때문에 실시한 것으로, 현대에는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지켜 보관하기 때문에 포쇄가 필요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실록과 같은 책은 습도 50~55%, 온도 20~21도 정도의 환경에서 보관하죠. 다만, 국보나 보물은 5년에 한 번씩 지정문화재조사를 실시해요. 수장고나 박물관에 있는 모든 문화재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거죠. 우연찮게도 올해가 지정문화재조사 기간이어서 우리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서책들을 조사 중이에요. 책을 한 장씩 넘기면서 이상유무를 확인하고, 사진으로 찍고, 기록으로 남기고, 조사자의 사인을 남기는 거죠. 어떻게 보면 포쇄와 비슷한 절차이기도 해요."

꼼꼼하게 보관해온 『조선왕조실록』은 한일강제병합 전후로 큰 시련을 겪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외사고가 철폐되면서, 이곳에서 보관되던 실록들은 대부분 경성제국대학과 창경궁 장서각으로 이동했죠. 때문에 오대산사고의 마지막 포쇄와 서적 목록 작성도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졌어요. 1909년 궁내부 사무관 무라카미 류키치는 오대산사고를 방문해 포쇄 및 현황을 조사했고, '오대산사고 조사보고서'를 남겼죠. 여기에는 사고의 위치·구조·관리비와 보유한 서책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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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준 학생기자가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이 일본에 반출됐다가 국내로 돌아오기까지 과정을 살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태백산·오대산·적상산 사고본 등을 모두 포함해 총 2219책이에요. 접근성이 높은 한양에 있던 춘추관사고본은 화재·전란으로 대부분 소실됐죠. 정족산사고본 1187책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태백산사고본 848책은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이 소장 중이죠. 적상산사고본의 대부분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으로 유출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외에 왕의 열람을 위해 특별히 제작해 규장각 부속 건물 봉모당에 보관 중이던 실록 6책, 춘추관사고본으로 추정되는 실록 일부와 정족산사고본의 일부인 99책이 남아있어요. 오대산사고본의 경우 75책만 남았죠.

본래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1913년까지 788책이 남아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동양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요청으로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된 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많은 수가 소실됐어요. 그 결과 『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50책, 『선조실록』 15책, 『효종실록』 1책, 총 75책만 남게 됐죠.

동경제국대학의 후신인 동경대에 소장돼 있던 오대산사고본은 2006년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가 동경대와 직접 3차례 회담을 가지면서 반환운동을 진행했고, 7월 7일 마침내 국내로 돌아왔죠. 이후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관리하다가 2023년부터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으로 이관·전시하게 된 겁니다.

지금까지 『조선왕조실록』의 제작 과정과 외사고의 역할, 『조선왕조실록』이 수백 년 동안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 등을 살펴봤는데요. 이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은 역사를 기록해서 후대에 전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노력이 담긴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알 수 있었죠. 그리고 그 뒤에는 오랜 시간 『조선왕조실록』과 사고를 지켜온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답니다.

동행취재=고일재(서울 한영중 1)·변우빈(경기도 화남초 6)·이서준(경기도 평촌중 1) 학생기자

외사고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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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과 선원보각이 있는 오대산사고의 전경.

외사고의 구조를 오대산사고를 예시로 살펴봅시다. 1606년(선조 39년)에 건립한 오대산사고는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실록각)과 왕실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 두 동이 앞뒤로 조성됐으며,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린 것을 1992년에 복원했죠.

사각과 선원보각은 규모나 형태가 비슷하니 실록을 보관한 장소인 사각 위주로 살펴볼까요. 2층 건물로 문서가 습기에 훼손되지 않도록 바람이 잘 통하는 2층(상고)에 실록과 왕이 직접 쓴 글인 어제 등을 보관했죠. 1층(하고)에는 의궤와 유학 경서, 법전, 관청에서 편찬한 기록물 등이 있었어요. 보관한 기록 목록은 포쇄 과정에서 남긴 보고서인 『실록포쇄형지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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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사고 중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등을 보관한 건물인 사각.

외사고 사각의 서적 관리는 춘추관이 맡았기 때문에 사각을 보수할 때는 건물 안의 서적을 안전한 곳에 옮기기 위해 춘추관의 사관이 파견됐어요. 반면 선원보각의 서적 관리는 왕실 족보 편찬 기관인 종부시가 담당했으며, 선원보각을 보수할 때는 종부시 소속 관리가 파견됐죠.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평소 『조선왕조실록』 만화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에 관심이 생겼어서 조선왕조실록박물관 취재가 정말 설렜죠. 정홍일 학예사님과 상설전·특별전을 살펴봤는데, 만화에서만 보던 자료들을 실물로 보게 돼 정말 신기했어요.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박물관도 있어서 실록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죠. 조선은 임금의 얼굴을 그리는 어진도 남겼는데, 초기에 그려진 태조의 어진에 비해 고종의 어진은 서양화 느낌이 나서 신기했죠.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사관을 뽑는 과정입니다. 선배 사관의 추천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집안 배경까지 살펴보고 시험을 거쳐 선발했다는 점에서 사관이 얼마나 중요한 직무인지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완성된 실록은 왕조차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는 규칙을 보며, 이 기록이 얼마나 엄격하고 철저하게 관리되었는지 느낄 수 있었죠. 박물관을 다녀오니 책으로만 알던 『조선왕조실록』이 더 친근하고 생생하게 느껴졌어요.

고일재(서울 한영중 1) 학생기자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저는 조선왕조실록박물관 방문을 통해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어요. 의궤와의 차이점도 알게 됐죠. 의궤는 조선 왕조의 공식 행사 보고서이고, 『조선왕조실록』은 해당 왕이 재위하던 시기에 사회 전반에 대해 기록한 역사서죠. 오대산에 왜 조선왕조실록박물관이 있는지 궁금했는데 오대산사고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으니 조선왕조실록박물관이 더 의미 있게 느껴졌어요. 실록을 포쇄하는 방법도 알아봤는데, 우리 실록을 잘 보존한 조상들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가 지정한 기록유산이라는 사실도 자랑스러웠어요. 『조선왕조실록』을 세상에 더 많이 알리고,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변우빈(경기도 화남초 6) 학생기자

오대산사고 부근의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 다녀왔어요. 먼저 상설전시관에서 『조선왕조실록』의 역사, 얽힌 이야기 등을 보며 사관들이 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실록을 집필하게 하기 위해서 왕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실록을 함부로 볼 수 없도록 했다는 원칙을 들었어요. 실록 인쇄 방법 등으로 당시 나라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죠. 특별전 '오대산사고 가는 길'에서는 실록을 보존하기 위한 선조들의 노력과 지혜를 엿볼 수 있었어요. 습기에 취약한 종이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기름을 먹인 종이를 여러 겹 덮었다는 사실을 통해 당시에 얼마나 실록 보존에 진심이었는지 느꼈죠. 예전에 사관이 왕의 식사 등 정말 개인적인 일까지 사초에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세히 기록했다는 것을 과장하려고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사실이었다는 것이 놀라웠죠. 왕들의 일화 중 재미있는 것도 많아 『조선왕조실록』을 직접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이서준(경기도 평촌중 1)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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