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태양의 도시 르자오(日照)가 한국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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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하늘이 붉게 번지면 57층 옥상 인피니티 풀에서 사람들은 바다로 가라앉는 노을을 벗 삼아 도심의 빌딩 숲을 굽어본다. 멀리 부둣가에서는 거대한 컨테이너들이 끝도 없이 겹겹이 쌓이며 세계 7위 항만의 위용을 드러낸다. 이곳은 춘추전국시대 거(莒)나라의 옛 땅, 갑골문자보다 오래된 역사를 품은 이야기와 4000년 세월을 견뎌온 은행나무가 뿌리 깊게 서 있다. 이름 그대로 ‘태양의 도시’ 르자오(日照), 서해 건너에 있는 이 도시는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이면 닿을 만큼 가까운 이웃이지만 여전히 한국인들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산둥성 르자오시 시내에 위치해 있는 57층 옥상 인피니티 풀. 김매화 기자
중국 6대 물류 항구 르자오항
르자오(日照)시는 인구 308만명, 중국 산둥(山東) 성의 동남부에 자리 잡고 있다. 지도상으로는 우리나라의 군산과 직선으로 마주하고 있다. 르자오는 항구의 도시다. 르자오항(日照港)은 1986년 개항한 중국의 ‘젊은’ 항구다. 태평양 경제권과 유라시아 대륙 경제 벨트가 만나는 요충지로 중국 국토의 3분의 1을 배후지로 둔다. 수심이 깊고 겨울에도 얼지 않는 천혜의 조건 덕에 르자오항은 초대형 선박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항구다.
중국 6대 항만 중 하나인 르자오항의 지난해 화물량은 5억5200만 톤, 컨테이너 물동량은 671만TEU(Twenty-foot Equivalent Unit)로 평택항의 약 6배다.

중국 산둥성 르자오시에 위치해 있는 세계 7대 물류 항구 르자오항. 르자오시 정부
‘젊은’만큼 르자오항은 기술력에서 앞선다. 세계 최초의 순안(順岸) 개방식 전자동 컨테이너 터미널을 구축했고 철광석은 하역과 동시에 가공하는 ‘원스톱 시스템’을 갖췄다. 르자오항의 두 개 항만 구역에는 76개의 부두가 있다. 해운·철도·도로·송유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종합 물류 허브로 두 개의 1000㎞급 철도가 항만과 직접 이어져 내륙과의 연결성을 크게 높였다.
르자오항에 입고된 원유는 곧바로 송유관을 통해 내륙으로 이동한다. 르자오항에서 중국의 장쑤(江蘇) 성 이정(儀征)까지 송유관 길이는 총 390㎞에 달한다. 르자오항에는 이런 송유(送油) 부두가 총 4개나 있다.
르자오시 정부 관계자는 “항만은 단순히 물류만 처리하는 곳이 아니라 원자재와 가공·유통이 동시에 이뤄지는 종합 생산기지”라고 소개한다. 실제로 광석·원유·곡물이 들어오면 항만 내 가공 설비에서 1차 가공을 거친 뒤 곧장 내륙이나 해외로 재수출된다.

르자오항의 모습을 담은 조형물과 홍보영상. 김매화 기자
산업과 항만의 결합
르자오는 단순한 환적항만이 아니다. 항만과 산업단지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시내에 자리한 글로벌 제지기업 ASIA SYMBOL(亞太森博)은 각종 종이제품, 포장재를 생산하는데 하루 생산량은 A4 용지로 3억장 분량이라고 한다. 생산된 제품들은 곧장 항만을 통해 글로벌 시장으로 나간다. 르자오에 있는 산둥철강(山東鋼鐵)의 연간 생산량은 3000만톤에 달하며 70여개 나라에 수출되고 있다. 르자오는 ‘항만+산업’ 모델을 통해 글로벌 공급망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르자오는 사실 오래전부터 한국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왔다. 2000년대 초 현대자동차, 금호 화공, 대우 시멘트 등 233개 한국 기업이 르자오에 진출했다. 당시 자동차 부품, 식품 가공, 의류가공 등 다양한 산업 분야가 포함한 중한 산업단지를 조성하기도 했지만 산업구조와 한·중관계의 변화 등 다양한 원인으로 현재는 48개의 한국 기업만 남아 있다.
르자오시는 계속해서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한국을 향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현지 관계자는 “르자오항은 현재 당진·평택항과 직항로가 열려 있고 연말에는 인천항과의 신규 항로도 개통될 예정”이라며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칭다오·상하이에 집중된 물류 루트를 분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원쥔(張文君) 한국산둥상회 회장은 “한국이 상하이나 칭다오와 같은 대도시에만 시선을 고정한다면 르자오라는 기회를 놓칠 수 있다”며 “산업과 물류자원을 모두 품은 르자오는 한국과 중국을 잇는 또 다른 관문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둥성 르자오시 쥐시엔에 있는 40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르자오시 정부
4000년된 은행나무와 춘추시대의 고도
르자오는 관광자원도 풍부하다. 춘추시대 거나라(莒國)가 바로 지금의 르자오 남쪽 쥐시엔(莒县)이다. 거나라는 춘추 초기 제(齊)·노(魯)·초(楚)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나라다. 전국시대에 접어들며 제·초에 병합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거’(莒)라는 지명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곳에는 춘추시대 고도의 유적을 바탕으로 만든 거국고성(莒國古城)이 있다. 복원된 성벽과 고루, 옛 거리는 2500년 전의 풍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고성 안에는 중국 전통 스타일의 장터와 민속 공연이 열려 춘추전국 시대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체험할 수 있다.
시간 여행은 르자오의 해발 300m에 달하는 푸라이산(浮來山)으로 이어진다. 르자오 남쪽에 위치한 이 산에는 40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뿌리내리고 있다. 둘레 15.7m, 수십 명이 둘러 서야 안을 수 있는 이 거목은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물든 은행잎이 장관을 이룬다. ‘천하제일은행’이라고 칭하는 이 은행나무는 하루 2000톤의 지하수를 빨아들여 거대한 수신(樹身)과 주변을 유지한다. 현지 관계자는 일 년 중 하루, 큰 가뭄이 든 날에만 인공으로 물을 준다며 르자오의 비옥한 땅 덕분이라고 자랑했다.
르자오는 항만의 도시이자 역사의 도시다. 세계 물류를 잇는 거대한 부두에서 춘추시대 성곽과 천 년 고목까지, 산업과 역사가 한 공간에 공존한다. 바닷바람에 실려 오는 항구의 기운과 은행잎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푸라이산의 고즈넉한 풍경은 르자오의 어제과 내일을 보여준다. 가까우면서도 낯선 이 도시는 한국 여행자들에게 또 다른 중국을 발견하는 경험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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