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이후락 극비방북…청산가리 캡슐 붙은 손에 김일성 악수 청했다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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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트리거60' ㉖ 7∙4 남북공동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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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29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왼쪽)이 서울에 온 박성철 북한 내각 제2 부수상과 악수하고 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이듬해 이행이 중단됐고, 이후 남북관계는 극한 대립과 화해 사이를 오갔다. [중앙포토]

해방 이후 남북관계는 반목과 질시, 그리고 갈등과 경쟁의 연속이었다. 일체의 대화가 없었다. 한반도는 그야말로 냉전의 표상이었다.

1960년대 말 들어 여건이 바뀌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화해 움직임 등으로 국제 정세는 요동쳤다. 국내 권력 강화가 긴요했던 남북의 최고 지도자는 서로가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한의 국가 수립 후 첫 당국 간 합의인 7·4 남북공동성명이 탄생했다. 국제·국내 정치적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 성명이지만, 이는 이후 166개 남북 합의서의 시작점이자 ‘대화하면서 대결하는 남북관계’로의 전환점이 됐다.

북한은 1960년 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시하면서도 ‘남조선 혁명’을 추구하는 이중 전략으로 한국을 흔들었다. 1968년에만도 청와대를 기습하고,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했으며,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20명을 침투시켰다. 남북 간에 대화는 고사하고 군사적 대치 수위만 높아갔다.

서로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긴장과 대립 일변도의 남북관계에 반전이 일어난 건 1972년 7월 4일이었다. 오전 10시 기자회견장이었던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대강당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나타났다. 그는 “최근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관계를 개선하며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회담이 있었다”고 입을 뗐다. 자신과 박성철 북한 내각 제2 부수상이 비밀리에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협상한 결과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후락은 “오랫동안 서로 만나보지 못한 결과로 생긴 남북 사이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긴장을 완화하며, 나아가 조국통일을 촉진하기 위해 완전한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고 이어갔다. 그러고는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을 골자로 하는 7개 항의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국민이 ‘멸공통일’에 익숙해 있을 때 나온 발표였다.

이보다 2년 전인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은 8·15 광복절 연설에서 “남과 북의 체제 중 어느 쪽이 더 국민의 복리를 증진할 수 있는지 선의의 경쟁을 하자”고 제안했다. 남북이 극한 대립하던 당시로선 느닷없었다. 여기엔 1·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과에 따른 자신감이 작용했다. 중앙정보부는 1969년 한국의 국민총생산(GNP)이 66억2000만 달러로 북한(31억2000만 달러)의 두 배를 넘는 것으로 분석했다.

한편에서 미국은 중국과 대화를 추진하며 한국에 북한과 대화를 종용했다.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 국가들은 스스로 안보를 책임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일방적으로 주한미군 7사단 병력 2만여 명을 철수시켰다. 박 대통령에겐 안보 위기이자 정치 위기였다. 1971년 대선에서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돌파구가 필요했다. 남북 대화가 국면전환용으로 제격이었다. 1970년 광복절 연설이 나온 배경이다.

이듬해 첫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다. 한 해 뒤 특사들이 오갔다. 이후락은 1972년 5월 2일 휴전선을 넘으면서 양복저고리에 청산가리 캡슐 두 개를 넣었다. 북한이 체포하거나 감금할 경우 자살하겠다는 의도였다. 박 대통령도 한때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루돌프 헤스도 화평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영국으로 단신 잠행했으나 영국은 감옥에 처넣지 않았소. 이 부장은 우리나라의 정보 총책임자요. 만약 그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면 국가적 중대사가 되는 것이오”라며 그의 방북을 말렸다. (김성진, 『박정희를 말하다』)

이후락, 억류 대비해 독극물 품고 방북
그러나 방북은 결정됐다. 박 대통령은 “자신(감)으로 대화에 임하되 북한이 우위라는 환상적 기를 꺾고, 평화통일을 위한 의견을 교환하되 상대방 요로의 사고방식 및 북한의 실정 파악에 중점을 두라”고 지시했다. 대화하더라도 경쟁에서 밀려선 안 된다는 복선이 깔렸던 것이다.

이후락은 평양에서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을 만났지만 진전은 없었다. 귀환 예정을 10여 시간 앞둔 5월 4일 자정 무렵, 북한 당국자가 잠든 이후락의 숙소 문을 두드렸다. 이후락을 태운 차량은 아스팔트에서 벗어나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이후락은 청산가리를 손에 쥐었다. 여차하면 삼킬 요량이었다. 그 순간 4층 건물이 나타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김일성이 있었다. 긴장에 땀이 나서일까. 악수를 청하는 김일성을 향해 팔을 뻗은 이후락의 손에 청산가리 캡슐이 붙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캡슐을 떼고서 악수에 응했다.

2시간 동안 이어진 대화에서 김일성은 주한미군 철수, 반공법 폐지 등을 주장하면서도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했다. 이후락은 직통전화 개설과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등을 골자로 한 공동성명 채택을 요구했고, 김일성이 이를 수용했다. 다만, 북한의 2인자인 김영주의 서울 답방은 그의 지병(‘식물신경부조화증’이라는 자율신경 계통의 병)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다.

5월 말 북한 박성철 부수상이 한국에 왔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은 북한에 공동성명 초안을 보냈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남북이 전쟁을 시작한 지 꼭 22년이 되는 1972년 6월 25일이었다. 이틀 뒤 평양이 수정한 내용을 보내왔고, 우리가 다시 수정해 확정했다.

이후락의 평양행과 공동성명 추진을 무리한 행보로 보는 목소리도 있다. 김성진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은 “이후락이 평양에 잠행한 진짜 목적이 영웅심 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었는지 아직도 의문”이라고 회고했다.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도 그해 11월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이후락이 개인적 위신 때문에 협상을 서둘렀다”고 했다.

박정희는 공동성명 발표 이틀 뒤 서울을 찾은 먀셜 그린 미 국무부 차관보를 만나 “북한이 대화에 응하는 것을 믿을 만한 행동이라거나 긍정적 의도로 해석하지 않는다”며 “북한은 즉각적인 정상회담을 제안했지만, 지금은 어려운 정치 문제를 논의할 때가 아니며 쉬운 문제부터 논의하자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대화를 시작했어도 여전히 대결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남북은 애초 목적 가운데 하나였던 국내 정치에도 성명을 이용했다. 공동성명 몇 달 뒤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발표했고, 북한은 그해 12월 헌법을 바꾸고 주석제를 도입해 김일성 유일 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둘 다 ‘남북 대화를 이어가려면 체제 안정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댔다.

아웅산 테러 2년 뒤 남북 고향방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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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북한이 저지른 버마(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현장. [중앙포토]

통일을 기대했던 분위기는 남북의 동상이몽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공동성명 이행을 위해 남북은 6차례 조절위원회를 열었지만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이유로 북한이 일방적으로 회의를 중단했다. 이듬해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세광의 총격으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며 남북관계는 경색됐다. 그 뒤 남북관계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북한은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의 목숨을 노리고 버마(미얀마) 아웅산 묘지를 폭파했지만 2년 뒤엔 남북 이산가족들이 고향방문단을 만들어 서울과 평양을 오갔다. 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7년 11월엔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했다가 1991년엔 남북을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의 특수관계”로 규정하며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한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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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서울에 물난리가 났을 때 북한은 쌀과 옷감 등 각종 구호 물품을 보냈다. [중앙포토]

1994년 6월에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했다. 그해 7월 25~27일 평양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만나기로 했으나 김일성이 7월 8일 사망해 회담은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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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이재명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올해 안에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싶다”고 밝혔다. 미국이 남북관계 개선을 압박하며 긴장 완화를 추구했던 1970년 전후의 국내외 상황을 연상시킨다.

7·4남북공동성명의 추진배경과 과정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대결과 긴장 일변도였던 남북관계에 대화와 협력 분위기를 조성하는 전환점이 됐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관계”라 규정하고 있지만, 결국 남이나 북은 적대적이라도 공존 관계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게 7·4공동성명의 유산이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issue/11765 

※다음은 ‘6·15 남북공동선언’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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