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불량국가 지도자 김정은, '반미연대' 선두그룹 올랐다 [view…
-
7회 연결
본문
3일 오전 8시 35분(현지시간) 베이징 고궁박물관 내 돤먼(端門) 앞에서 기념촬영을 마친 내외빈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양 옆에 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맨 앞에서 이끌며 전승절 행사가 열리는 천안문으로 향했다. 냉전 시대 미국과 대결한 러시아와 포스트 냉전 시대에 미국과 경쟁하는 중국, 그리고 고립된 불량 국가였던 북한이 이제는 ‘반미 연대’의 선두 그룹이라고 선언하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앞줄 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앞줄 왼쪽),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앞줄 오른쪽)과 각국 외국 정상들이 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전승절 열병식에 앞서 천안문 성루로 향하고 있다. EPA=신화통신, 연합뉴스
이날 ‘중국 인민 항일 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 행사를 주최한 건 시진핑이지만, 망루 외교의 중심에는 김정은이 있었다. 북·중·러 정상이 한 자리에 모인 건 66년 만으로, 김정은은 옛 혈맹 중국, 새 혈맹 러시아와 동등한 반열에서 망루에 섰다.
10년 전 70주년 전승절 때와 비교하면 달라진 북한의 위상은 확연해진다. 당시 북한에서는 최용해 노동당 비서가 대표로 참석했다. 중국은 ‘실세’인 그를 정상급 귀빈석에 앉히는 것으로 예우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최용해는 30명이 자리한 외빈석 맨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시진핑과 단독 면담도 하지 못한 채 행사 직후 곧바로 평양으로 돌아갔다.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건 자유주의 진영 국가 정상 중 유일하게 참석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었다. 단체사진 촬영 때 박 대통령은 시진핑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여사 바로 옆에 섰다. 이번에는 김정은이 그 자리에 섰다. 촬영 뒤 천안문으로 향할 때 박 대통령이 섰던 시진핑의 왼쪽에도 이날은 김정은이 섰다.

맨 앞줄 왼쪽부터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부인 펑리위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그리고 각국 외교 사절단 대표들이 3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 앞서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EPA=연합뉴스
천안문 망루에서 박 대통령은 시진핑의 오른쪽 두번째에, 김정은은 바로 왼쪽에 섰다. 오른쪽이 외교관례 상 상석이지만, 시진핑과의 거리는 김정은이 더 가까웠다. 시진핑은 푸틴 다음으로 김정은을 각별히 챙기며, 비슷한 수준의 의전을 제공했다.
시진핑의 왼쪽에 김정은, 오른쪽에 푸틴이 선 모습은 이들이 곧 반미 연대의 구심점이라는 은유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양 옆으로는 국가 정상급 귀빈들이 자리했는데, 중국이 우군으로 ‘포섭’하기 위해 공들여온 동남아, 중앙아, 남미 등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주로 남반구에 위치한 신흥국과 개도국을 통칭) 국가가 대부분이었다. 북·중·러 주도로 이들과 함께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도전하는 구도를 연출하는 게 시진핑의 의도로 보인다.

3일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행사에서 앞줄 왼쪽부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자리했다. 교도통신, AP=연합뉴스
미 CNN 방송은 “김정은은 주변부가 아닌 중심에 섰다. 시진핑은 서방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계 질서를 만들기 위해 김정은이 필수적인 파트너라고 인식한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사실 최근 중국은 북·러와 하나의 세력으로 묶이는 걸 오히려 경계해왔다. 우크라이나전 발발 이후 뒤로는 러시아를 지원하면서도 북한과 러시아가 군사 협력을 강화하며 동맹 관계를 구축하자 거리 두기를 했다. 북한에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고, 고위급 교류나 공식 행사에서까지 중국의 길들이기로 인한 양국 간 파열음이 도드라졌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 들어 미국의 대중 압박 수위가 높아지자 시진핑은 북·중·러 간 ‘신(新) 북방동맹’의 부활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중·러 관계는 시종 우호적으로 유지돼온 만큼 김정은을 끌어들이는 게 반미 3각 연대의 마지막 퍼즐이었던 셈이다.

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전승절 열병식 후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환영 연회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양 옆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나란히 도착하는 모습.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즉각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는 열병식 시작 직후 올린 SNS 트루스 소셜 글에서 시진핑을 향해 미국의 희생을 기억하라고 지적하며 “반미(against United States of America)를 모의하고 있다”고 푸틴과 김정은도 지칭했다. 불과 지난달 25일 한·미 정상회담 때만 하더라도 “김정은과 올해 만나겠다”고 했던 트럼프가 셋을 싸잡아 비난한 것이다.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김정은으로서는 양손에 ‘꽃놀이패’를 쥔 격이 됐다. 러시아에는 파병을 지렛대로 전략무기 기술 지원 등 반대급부를 요구하며 안보적 이익을 누릴 수 있고, 중국과도 경제 협력을 활성화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방중에 경제 분야 참모인 김덕훈 당 경제비서 겸 경제부장이 동행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조치로 보인다. 북한의 대중 경제 의존도는 95% 내외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전 종전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김정은은 시진핑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대러시아 일변도의 대외 정책을 조정해 위험성을 줄이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향후 북·미 협상 재개를 염두에 두더라도 러시아뿐 아니라 중국의 지지를 확보하는 게 협상력을 높이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번 방중을 통해 여러 측면에서 자신감을 키운 김정은은 핵능력 고도화 등에 나설 우려가 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일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조어대) 국빈관에서 열린 회담 후 서로 포옹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김정은은 이날 푸틴과 별도의 양자회담도 했다. 리셉션 오찬 뒤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까지, 세 사람이 함께 푸틴의 의전 차량인 아우루스 세나트 리무진을 타고 회담장인 조어대로 이동했다. 회담에서 푸틴은 “특별한 신뢰와 우정, 동맹적 성격”을 언급하며 파병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김정은은 “러시아를 도울 수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며, 이는 형제의 의무”라고 화답했다. 회담은 약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됐으며, 회담이 끝난 뒤 김정은을 배웅하며 푸틴은 그의 방러를 다시 초청했다.
황태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정은은 향후 러시아와 정찰위성, 잠수함, 미사일 등 군사기술과 원유 지원, 노동자 파견을 통한 외화벌이 등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며 “중국 입장에서도 트럼프 2기에서 김정은의 몸값이 높아지는 구도가 형성되면서 북한을 다시 영향권 아래 둘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