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취준생은 AI로 자소서, 기업은 AI로 걸러내…코미디같은 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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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취업시장 빛과 그림자

# 지난 1일 서울 신촌의 한 대학 도서관. 취업준비생 김예진(25)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펴더니 챗GPT를 소환했다. “이 기업에 맞는 지원 동기와 내 장단점을 정리해줘.” 인공지능(AI)으로 자기소개서 초안을 만들고 문장을 다듬는 게 요즘 그의 주된 일과 중 하나다. “제 주변에 AI를 안 쓰는 취준생은 거의 없어요.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가 중요할 따름이죠. 관건은 마치 AI를 쓰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만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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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현민 기자

올가을 본격적인 취업시즌을 앞두고 ‘AI 변수’가 최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AI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고도화됨에 따라 실제 채용 과정에서 사람보다 AI가 더 많은 역할을 맡게 되면서 취준생도, 기업들도 ‘AI가 지배하는 취업시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생성형AI를 활용한 취준생의 자소서 작성이 일상화되고 기업들도 AI 면접을 통해 지원자를 선별·평가하는 현실 속에서 기업·구직자 모두 AI에 대한 불신 또한 만만찮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 5월 채용 플랫폼 캐치 조사 결과 구직자 10명 중 9명 이상(91%)이 생성형AI를 활용해 자소서를 작성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AI를 안 쓴다’는 응답은 9%에 불과했다. 취업컨설팅회사 더라이징스타헤딩 정재훈 팀장은 “취업 과정에서 AI는 이제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됐다”며 “예전의 ‘컴활 자격증’처럼 지금은 AI를 잘 쓰는 능력 자체가 취준생의 기본 소양이자 역량으로 인정받는 시대”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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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기업의 시선이 여전히 곱지만은 않은 게 현실이다. 조사 결과 면접 등 채용 과정에서 AI를 활용한다는 국내 기업이 41.1%였는데, 그중 챗GPT를 활용한 자소서에 대해서는 64.1%가 ‘독창성과 진정성이 부족하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AI 탐지 프로그램을 가동해 감점 또는 불합격 처리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실제로 응답 기업의 42.2%는 AI 활용 자소서로 확인될 경우 ‘해당 전형 감점’, 23.2%는 ‘불합격’ 처리한다는 방침을 세워둔 것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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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삼성전자 감독관이 직무적성검사 응시자 예비 소집을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판교의 IT 기업 인사 담당자 이모(38)씨는 “AI를 사용한 자소서의 경우 문장은 매끄러워 보여도 내용은 판에 박힌 것처럼 정형화돼 있거나 부실한 경우가 적잖다”며 “허위 사실이나 경험 등 이른바 ‘할루시네이션’이 확인돼도 명백한 감점 사유”라고 말했다.

취준생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대학생 이주영(26)씨는 “AI를 쓰지 않으면 나만 뒤처질까봐 어쩔 수 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찝찝함을 지울 수 없는 게 사실”이라며 “동료들도 ‘취업시장이 점점 더 낯설고 불확실해지고 있다’며 답답해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취준생은 너도나도 AI의 도움을 받아 취업 도전장을 내고 기업은 또 다른 AI로 응시자를 걸러내는 등 구인·구직자 모두 AI를 적극 활용하곤 있지만 정작 어느 누구도 AI를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미증유의 취업시장이 도래한 셈이다.

# 지난 2일 서울 강남의 한 스터디 카페. 올 하반기 취업에 도전하는 대학생 다섯 명의 ‘AI 면접 스터디’가 한창이었다. “시선이 약간 흔들린 것 같다” “자세를 좀 더 바르게 해야지” 등의 피드백이 끊임없이 오갔다. 조은영(24)씨는 “AI 면접은 사람보다 훨씬 더 기계적”이라며 “표정이나 시선 등을 더욱 세밀하게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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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현민 기자

기업들이 채용 전형에 AI 면접과 AI 역량검사를 앞다퉈 도입하면서 하반기 채용 시즌을 앞둔 취준생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임유정 라온제나스피치 대표는 “AI 면접은 사실 ‘능력 있는 사람을 뽑는’ 것보다는 ‘부적합자를 걸러내는’ 기능에 더 최적화돼 있다”며 “표정·시선과 목소리 톤 등 하드웨어적 요소가 감점 요인으로 작용하는 구조다 보니 구직자들도 AI의 눈에 들기 위해 형식적인 부분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AI 면접 학원을 따로 수강하는 취준생도 늘고 있다. 최대 20만원에 달하는 일대일 수업에 ‘4시간 완성’이라고 홍보하는 회당 7만5000원짜리 인터넷 강의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취준생 정원형씨는 “채용 규모는 갈수록 줄고, AI 면접 등 준비할 건 계속 늘고, 돈은 더 많이 들고…. 2030세대 취업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분위기”라며 고개를 저었다. 한국노동연구원 조사 결과 구직자의 67.7%는 여전히 사람이 평가하는 기존 채용 방식을 선호한다고 답했고 AI 기반 채용을 선호한다는 응답은 32.3%에 그친 것도 청년세대의 이 같은 불안감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반면 기업들이 잇따라 AI를 활용해 자소서를 평가하고 면접을 실시하는 배경에는 ‘효율성’과 ‘공정성’ 측면에서 크게 도움이 된다는 판단도 작용하고 있다는 게 인사 담당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특히 수백~수천 명의 지원자가 몰리는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경우 AI를 활용하면 적임자를 가려내는 시간과 노력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 유통 대기업 관계자는 “AI 도입 후 채용 업무가 한결 수월해진 게 사실”이라며 “면접관이 보지 못한 포인트를 AI가 잡아주는 등 효용성도 매우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기업이 내세우는 ‘기계적 공정성’과 구직자들이 우려하는 ‘신뢰성’이 여전히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상기 테크프론티어 대표는 “표정이나 어조에 기반한 AI의 판단이 아직은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고 실제 속이는 것도 어렵잖은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AI가 사람의 미세한 감정까지 평가할 경우 오류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며 “AI를 활용하되 민감한 부분은 사람이 재확인·재평가하는 등의 보완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 지난달 30일 오후 AI 면접을 마친 황지우(27)씨도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번에도 떨어질 것 같아요. 매번 AI 면접 단계에서 탈락했는데 근거를 알 수 없으니 억울하고 답답할 따름입니다.” 최근 AI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다는 배경훈(31)씨도 “AI 알고리즘이 잘못됐거나 시스템 오류로 불합격 처리되면 대체 누가 책임지는 거냐.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지 공개라도 해줘야 개선을 하지 않겠느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전문가들도 AI를 활용한 채용 방식이 정착되려면 제도적 보완과 함께 개인정보보호법과 노동법 등의 모호한 규정도 새롭게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하고 있다. 특히 신뢰 가능한 AI 알고리즘과 공정한 평가 체제 구축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창배 국제인공지능윤리협회 이사장은 “공정한 채용은 무엇보다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하는 만큼 어떤 책임 구조 속에서 작동하고 제어되는지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며 “누군가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채용이란 행위의 최종 책임은 결국 인간에게 있다는 걸 꼭 유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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