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모범생 동생, 한순간에 이춘재 대신 살인범됐다" 33년 만의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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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중 9차 사건 용의자로 몰렸다가 또 다른 성범죄 사건에 연루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고(故) 윤동일씨 친형인 윤동기씨(오른쪽)와 재심사건 변호인인 박준영 변호사가 지난해 9월 3일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연합뉴스

억울하고 답답하게 33년을 기다렸는데 (검찰에서) 무죄라고 했다니 마음이 후련합니다.

이춘재 연쇄살인 9차 사건의 범인 등으로 몰려 옥살이를 하다 병으로 숨진 고(故) 윤동일씨의 형 윤동기(62)씨는 9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기씨는 이날 직장에 출근하느라 검찰의 구형을 직접 듣지 못했다. 하지만 검찰의 무죄 구형을 반기며 “그동안 도와주신 분들께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들 형제에게 비극이 닥친 것은 1990년 11월이다. 인근의 다른 동네에서 10대 여성이 성폭행을 당한 뒤 숨진 채 발견됐다. 이른바 이춘재 9차 연쇄살인 사건이다. 이후 윤씨 집 인근에 사는 A씨가 강제 추행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갑자기 찾아온 형사들은 “A씨가 동일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고 주장하며 수갑을 채우고 연행했다. 동일씨는 잠 안 재우기, 뺨 맞기 등 온갖 고문을 당하며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가족들은 그사이 사라진 동일씨를 찾아다녔다. 동일씨의 행방을 알게 된 건 뉴스였다. TV 영상 속 동일씨의 모습 밑에 달린 자막엔 ‘연쇄살인 사건 용의자’라고 쓰여 있었다. 동기씨는“동생은 학교 다닐 때 우등상을 받을 정도로 모범생이었는데 살인사건 용의자라는 뉴스를 보고 가족들 모두 당황했다”며 “동생의 고교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도 찾아와서 ‘동일이가 그럴 애가 아니다. 누명을 쓴 것 아니냐’고 답답해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동일씨와 가족들의 접촉을 엄격하게 차단했다고 한다. 윤씨 가족은 변호사를 선임한 뒤 현장 검증 장소를 찾아갔다. 동일씨는 고문으로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난 범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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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윤동일씨가 고교시절 받은 우등장. 형 동기씨는 동생이 모범생이었다고 회상했다. 형 윤동기씨 제공

다행히 9차 사건 피해자 교복에서 채취된 정액과 동일씨의 혈액 감정 결과 불일치하면서 살인 혐의는 벗을 수 있었다. 하지만 A씨를 강제추행했다는 혐의로 1991년 기소된 동일씨는 그해 4월 23일 수원지법으로부터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불복해 상소했으나 모두 기각돼 1992년 1심 판결이 확정됐다.

몇 달 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동일씨는 삶은 무너졌다. 밖을 나서면 경찰이 동향 파악을 이유로 감시했다. 주변의 눈초리도 따가웠다. 건강도 좋지 않았다. 가슴에서 암 덩어리가 발견됐다. 2차례에 걸쳐 가슴뼈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1997년 사망했다. 그의 나이 겨우 27살이었다. 동기씨는 “동생은 수감 전까진 밝고 건강했는데 고문 후유증과 억울한 마음 등이 암으로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다. 동일씨 사망 이후 가정 형편은 악화됐고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셨다.

동기씨가 동일씨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게 된 건 2019년 9월 이춘재가 잡히면서다. 연쇄 강간·살인 사건들이 수면으로 올라왔다. 동기씨는 연쇄살인범의 정체가 ‘이춘재’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춘재는 동기씨의 집 인근에 사는 이웃이자 중학교 동창이었다. 동기씨는 “처음엔 설마 하는 마음이 컸는데 사건이 계속 보도되자 동생의 억울함을 풀고 싶어서 재심을 청구하게 됐다”고 말했다.

재심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경찰관들의 가혹 행위와 잘못된 수사 기록이 드러났다. 동일씨가 옥살이를 하게 된 계기가 된 피해자 A씨의 진술도 경찰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달 26일 증인으로 출석한 A씨는“당시 동일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적 없다. 오히려 경찰에 ‘동일씨는 범인이 아닌 거 같다’고 했다”고 진술했다. A씨는 당시 피해자 조서에 날인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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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가 자백한 14건의 연쇄살인 사건. 신재민 기자

檢 "오랜 시간 불명예에 사죄…불법 조사, 증거 부족"

이날 수원지법 형사15부(부장 정윤섭) 심리로 열린 동일씨의 재심 재판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오랜 시간 불명예를 안고 지낸 피고인과 그 가족에게 사죄드린다”며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검찰은 “과거 피해자 진술 확보 과정에서 적법 절차가 준수됐다고 보기 어렵고 피고인 범인으로 특정할 증거도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동일씨의 재심사건 변호를 맡은 김칠준 변호사는 “그(동일씨)가 억울하게 유죄를 받았던 과정, 불법 수사 또는 사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 재심에서 확인되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박준영 변호사도 “35년 전 수사기관은 심증만으로 피고인을 이춘재 사건 9차 범인으로 피고인을 몰았고 그를 구속하고자 피해자의 진술을 왜곡하고 피고인의 서명 날인을 강요했다”고 지적했다. 아직 진범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동기씨는 “동생이 누명을 쓰지 않았다면 현재까지 잘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고문했던 형사들이 원망스럽다. 그 형사들의 재산이라도 몰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동일씨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관 4명은 재심 재판의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끝까지 재판장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생각해보니 동생과 찍은 사진도 한장 없다. 너무 후회된다”며 “선고 공판엔 꼭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동일씨에 대한 재심 선고는 오는 10월 30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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