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더 센 제재” 외친 EU “러 석유 끊어” 트럼프에 꿀먹은 벙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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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향해 러시아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높이라고 촉구해온 유럽연합(EU)이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당장 중단하라”는 역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러 추가 제재에 따른 위험부담을 피하기 위해 EU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안을 내놓은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지난 7월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미국과 EU 간 무역 합의 발표 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유럽으로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EU는 이미 2027년 말까지 러시아산 화석연료 수입을 전면 중단하겠다는 자체 계획을 마련해뒀다. 하지만 트럼프가 갑자기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EU가 트럼프의 도전 과제에 답을 찾기 위해 우왕좌왕하고 있다”며 “트럼프의 요구를 들어주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분석했다. 헝가리·슬로바키아 등 러시아산 에너지에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물론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거대 경제권 국가도 반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인도와 중국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라고 요구한 것도 EU로선 곤혹스럽다. WSJ는 “유럽은 다른 나라를 압박하는 데 관세보다 개별 기업을 제재하는 걸 선호한다”며 “특히 유럽은 여전히 중요한 수출 시장인 중국과의 무역 전쟁을 매우 꺼린다”고 평가했다.
이에 더해 트럼프 대통령은 벨기에에 보관 중인 러시아의 동결 자산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쓰여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그동안 글로벌 자본의 안전한 도착지라는 평판에 흠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유럽 내 러시아 동결 자산을 활용하기를 꺼려온 유럽으로선 고민이 되는 지점이다. WSJ는 “예치금에서 발생한 이자만을 우크라이나 방어 재원으로 사용해왔던 EU가 동결된 러시아 자산 3000억 달러의 일부를 가져다 쓰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며 “전쟁 비용이 누적되면서 기존 계산법에도 변화가 필요해졌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과제들을 마주한 EU는 장고에 들어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17일 열린 EU 27개국 상주대표(대사급) 회의 에서 당초 예정됐던 19차 대러 제재 패키지 발표가 미뤄졌다. WSJ는 “일정 연기는 EU가 대러 제재 강도를 높이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이뤄진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역제안이 미국 우위의 국제질서를 상기시켰다”고 평가했다.
트럼프가 자신의 요구를 EU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았을 거란 관측도 나온다. EU를 당황하게 만들어 미국에 대한 대러 추가 제재 압박을 피하려는 의도라는 게 WSJ의 분석이다. EU가 달성할 수 없는 수준으로 대외 정책의 문턱을 높게 설정한 뒤 미국 역시 EU의 요구 사항을 수용하기 어렵다고 반대 명분을 쌓고 있다는 것이다. WSJ는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민간인에 대한 공격 등을 놓고 가끔 목소리를 높이기는 했지만, 러시아에 대한 가혹한 조처를 하겠다는 오랜 위협을 실제로 이행하지는 않았다”고 꼬집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8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등과 회동 후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대러 제재 수위를 끌어올리는 게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의 에너지 흐름을 더 옥죄면 세계 경제가 영향을 받고 이로 인해 미국 내 물가 상승 등 악영향이 올 수 있어서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평화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것도 트럼프 대통령이 대러 제재를 머뭇거리는 요인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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