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군벌·아편 혼돈의 시대…청나라와 함께 어머니 집안도 무너졌다 [왕겅우 회고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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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 씨 집안 3남매가 태어날 때는 재산이 아직 넉넉하고 마당이 여럿 있는 큰 저택에 백여 명 식구가 함께 살고 있었다. 식사시간에 사람들을 불러모으던 징소리 이야기를 할 때 어머니는 표정이 엄숙해졌다. 남자들은 큰 대청에서 식사를 하고 어머니는 안식구들과 함께 안쪽 대청에서 식사를 했다.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머니는 대가족제도 안에서 산 마지막 세대에 속했다. 남자들이 하나둘씩, 그리고 여자들도 아편으로 쓰러져 갔다. 청나라가 무너지고 군벌이 할거하는 혼란 속에 지방의 군대들이 지역 내 상인과 지주들에게서 제멋대로 “세금”을 걷게 되었다.

군벌의 착취와 아편의 협공 앞에 둥타이의 딩 씨 집안은 무너졌다. 전장의 본가는 조금 더 버텼다. 어머니의 집안 이야기에는 회한의 감정이 묻어 있었지만, 내가 강하게 받은 인상은 집안 몇몇 어른들에 대한 어머니의 신랄한 비판에 있었다. 아편의 해독에, 헤픈 낭비에, 잘못된 재산 관리에, 지나치게 컸던 대가족의 규모에, 그리고 무엇보다 빠르게 변해가는 지역 사정에 적응하지 못한 남자들의 무능력에 많은 불평을 쏟아놓으셨다.

어머니 집안은 전형적인 지방 유지 가문이었다. 아들들은 열심히 공부해 관직에 나가도록 독려받았다. 외조부님은 고전 공부에 별 소질이 없어서 집안의 소금 사업을 맡으셨다고 한다. 어머니가 태어나신 1905년까지는 집안이 아직 넉넉했으나 얼마 후 청나라가 무너지면서 종래의 관청 쪽 연줄이 끊어져 버렸다.

그 후 외조부님은 친척들과 함께 사업을 유지하고 대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새로운 종류의 사업 능력이 필요했는데 집안에는 사업에 진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위안스카이 총통의 불안한 공화정부나 그 뒤를 이은 군벌들과 관계를 맺을 연줄도 없었다. 딩 씨 집안이 아는 재간이란 유교적 가치에 매달려 독서로 출세하는 자손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천하제국 전통의 변화에 자기들도 웬만큼 적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수는 있지만, 유교의 핵심이 통치의 기본 원리로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에 의심을 품은 일이 없는 것 같다.

만주족 통치가 끝난 덕분에 어머니에게 좋은 일도 하나 있었다. 왕조가 무너지고 국민당 정부에서 전족(纏足) 폐지라는 진보적 정책을 추진하는데도 어머니는 전족을 당할 뻔했다. 전족을 하라는 소리에 어머니는 외조모님에게 울며 매달렸고 외조모님도 함께 눈물을 흘렸지만 방침을 바꿀 수 없었다. 어머니를 사랑하던 하녀가 발을 묶어주다가 차마 참지 못해 외조모님께 간청하면서 인근의 가문 중에도 전족을 폐지한 집이 많다고 말씀드렸다. 마침내 외조모님도 마음을 바꾸셨다. 어머니 발이 작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전족을 하려 들지 않았다면 더 컸을 것이라고 그분이 단정하시지는 않았다.

[역주 : 전족은 송나라 때(12세기) 확산되었다. 기녀(妓女)의 풍속으로 시작했다가 상류층에 퍼지고 차츰 중-하류로 퍼져나갔다. 청나라 때는 여성의 절반이 전족을 행했고 한족 상류층은 거의 100%였다. 19세기 후반 모든 개혁운동에서 중요한 타파 대상이었으나 1911년 신해혁명 이후에야 본격적 혁파가 시작되었다.]

어머니가 자라나는 동안 사업이 기울면서 가문도 무너져갔다. 외삼촌은 온종일 고전 공부에 빠져 지냈고, 붓글씨와 장기 정도가 오락과 휴식이었다. 어머니와 이모도 집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어머니는 산문 감상에 맛을 들여 많은 글을 읽었고 읽지 말아야 할 〈홍루몽〉 같은 소설까지 읽었다. 부덕(婦德)에 관한 글을 비롯해 자라나면 외조모를 도와 살펴야 할 대가족 집안의 관리에 필요한 여러 가지 실용적 기술에 관한 글을 공부했다.

가장 자랑스러운 성취는 많은 연습으로 예쁜 소해(小楷)체 글씨를 쓰게 된 것이다. 그런 집안 여자아이들이 꼭 익혀야 하는 재주였다. 사촌언니 한 분과 함께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종종 말씀하셨고, 서예로 큰 평판을 얻은 그 언니 못지않게 잘 쓰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림만은 그 언니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고. 그 이모님은 뛰어난 미인이자 뛰어난 화가로 인근에서 명성을 떨치셨다고 한다. 1980년 상하이에서 뵈었을 때 80세 가까운 연세에도 대단한 미모를 지키고 계셨고, 어머니께 전해달라고 서명해서 주신 부채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나는 2010년 4월에 마침내 둥타이를 찾아갔으나 어머니가 말씀하시던 큰 저택과 마당들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위치가 어디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팔리고 재개발되었는지 동네 사람들이 말해주었다. 그 터에 지어진 집들에 수십 가구가 살고 있었다. 부근 사람들 중에 딩궁관(丁公館), 즉 딩 씨 저택에 관한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사람은 백여 미터 거리에 있는 다리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아직도 딩궁차오(丁公橋)라 불리는 이 다리가 딩 씨 땅의 경계선에 있던 것이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머니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나는 만족했다.

대부분 이야기는 이포에 전쟁이 찾아온 1941년 이전, 어릴 때 들은 것이다. 첫 이야기들은 듣기 좋았다. 이포에는 주변에 친척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 이야기들 덕분에 세 식구의 조그만 가정이 많은 아저씨 아줌마들, 멀고 가까운 종형제들의 관계망 속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더 뒤의 배경에는 조부모님들과 그 세대 친척들이 버티고 계셨다.

많은 친척의 모습을 사람마다 한두 개씩의 일화로 생생하게 그려주는 이 기막힌 교육을 통해 그들이 어머니나 아버지와, 그리고 결국 나와 어떤 관계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내 정신세계에 자리 잡은 친족들의 모습 중 외가 쪽은 외삼촌과 이모 외에는 모두 흐릿한데 친가 쪽은 4대에 이르기까지 명료하고 정확하게 만든 것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자기 집 쪽보다 아버지 집 쪽 이야기를 언제나 더 좋게 하셨다. 그분이 왕 씨 집안을 진심으로 존경하신 것인지, 유교적 의무감에 따라 아버지 집안을 내가 존경하도록 가르치신 것인지 아직도 분명치 않다. 양쪽 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왕 씨 집안은 부유한 적이 없으면서 유교적 전통을 굳게 지켰고, 장사 일에 관계하거나 아편에 빠진 일이 없었으니까. 적어도 이것이 어머니가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골라 해줌으로써 내게 심어준 우리 집안의 긍정적 모습이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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