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지 조각으로 시(詩)를 썼다, 고요의 시간이 쌓여 기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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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Clouds', 2024, 한지에 혼합매체, 39.5x48cm. [사진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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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Enconter',한지에 혼합매체, 199x143cm. [사진 갤러리현대]

"불로 한지를 태우는 작업을 할 땐 정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잡념 없이 집중해 작업하는 과정을 가리켜 '수행'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그 과정이 너무 즐거워요. 제 작업은 수행보다는 오히려 놀이에 더 가깝습니다."

김민정, 갤러리현대 개인전#한지로 구현하는 현대 추상#한지 재료 'ZIP'연작 등 신작#가로 8m의 대형 작품공개

마음이 더욱 여유로워진 걸까. 그의 작품은 이전보다 더 편안하고 밝아졌다. 불에 태워진 한지를 지그재그로 치밀하게 쌓아 올린 작품 '집(Zip)' 연작은, 부드러운 파스텔 색채 덕분에 긴장보다는 균형감과 리듬감이 도드라져 보인다.

한지와 먹, 불을 재료로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작업해온 김민정 작가의 개인전 '원 애프터 디 아더(One after the Other)'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오는 19일까지 열린다. 2021년 '타임리스(Timeless)' 이후 갤러리현대에서 4년 만에 여는 전시로, 신작 '집(Zip)' 연작 6점을 비롯해 지난해 아트바젤에서 호평받은 대형 설치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한지를 염색하고, 가장자리를 불태우고, 반복과 겹쳐 쌓기 등의 독특한 기법으로 화면에 자기만의 선(線)을 구현해온 그가 최근 도달한 추상예술의 경지를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집(Zip) 연작은 안정감이 돋보인다. 가장자리가 태워진 한지 조각은 서로 조금씩 비스듬히 놓였지만, 각 조각은 결국 하나로 연결되며 '완결'된다. 김씨는 "어렸을 때 옷의 지퍼를 올릴 때 느꼈던 신기함과 행복한 감정을 생각하며 만들었다"며 "여기에선 서로 다른 두 요소가 맞물리며 하나가 된다. 각 조각이 하나로 수렴되는 과정 자체가 치유와 같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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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조각을 지그재그 패턴으로 겹쳐 붙이며 연결한 'zip' 연작. [사진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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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스위스 아트바젤 바젤의 언리미티드 섹터에 출품해 호평받은 가로 8m의 'Traces'[사진 갤러리현대]

지하 전시공간에는 그의 대표 연작 '산(Mountain)'과 '타임리스(Timeless)'가 놓였다. 그는 "처음에 바다의 파도 소리를 표현하고자 했지만, 완성하고 나니 구불구불한 물결의 곡선이 오히려 고향 광주의 산과 닮아 있어 제목이 '산'이 됐다"며 웃었다. 산이면 어떻고, 바다면 또 어떤가. 본래 의도에 집착하지 않고, 결과를 보고 이를 새로운 의미로 흔쾌히 받아들인 작가의 태도에서 조화와 순응의 지혜가 읽힌다.

지난해 아트바젤 바젤에서 먼저 선보여 호평을 받은 가로 8m 길이의 대작 '흔적(Traces)'도 눈길을 끈다. 맑은 먹의 곡선이 겹치며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풍경이 마치 높은 정상에서 바라보는 대지의 모습처럼 장엄하고 고요하다. 2층 전시장에선 '연결'과 '공존'이라는 주제를 드러내며 광활한 우주처럼 또 다른 풍경을 이룬 다양한 작업을 선보인다.

김씨는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1991년 한국을 떠나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국립미술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떠난 그곳에서 그는 "내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재료가 한지와 먹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지는 그에게 재료 그 이상의 의미다. 그는 "장인의 손을 거쳐 제작된 한지는 그 자체로서 이미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며 "여기에 내가 무엇을 더한다는 것이 늘 조심스럽다. 늘 겸허한 마음으로 종이를 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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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연작 앞에 선 김민정 작가. 그는 "한지에는 천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했다. 사진 갤러리현대]

그러나 다시 궁금해진다. 그는 왜 한지로 작업해야 했을까. 한지를 태우는 작업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이에 대해 그는 "모든 작가는 자기만의 선이 있다. 피카소의 선이 다르고 마티스의 선이 다르다"며 "한지를 태운 것은 나만의 선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시도한 실험이었다"고 말했다. 그에 앞서 종이를 태운 작가들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작가들이)종이를 태우는 게 파괴의 목적이었다면, 나는 종이를 매개로 내가 손으로 긋는 선보다 더 강한 선을 만들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종이를 태우는 행위는 그에게 '소멸'이 아니라 '생성'의 과정이었다는 설명이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다시 '수행' 얘기를 꺼냈다. 그는 "사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수행이란 말"이라며 "수행이 아니면 어떤가. 그냥 재미있게 종이를 태우고 끄면서 노는 것이면 어떠냐?"고 반문하며 웃었다. 이어 "음식이 그렇듯이,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은 그 사람이 먼저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을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한다"며 "제 작품을 보는 사람들도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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