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아침달 큐레이팅, 잔인하고도 따뜻했다...내 가능성을 초벌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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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현 시인. 첫 시집엔 투고한 시를 거의 다 싣고, 열 편의 시를 추가로 담았다. “시에 관련한 메일에 본명 강동호를 쓰지 않고, 필명 강이현을 썼는지 몇번이고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혼자만 알고있던 자아가 세상에 나오게 된 거라 스스로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김성룡 기자

지난 8월 출간된 강이현(30) 시인의 첫 시집 『다른 명찰을 보여주는 관계자』(아침달)의 마지막 시 ‘들판’엔 이런 구절이 있다. “주위의 모든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나를 받아들이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들판과 어둠이 하나가 되는 곳에서/어떻게 해도 풍경에 들어설 수 없는 유령의 마음을 깨달았다”

화가에서 시인이 된 강이현(30)씨 인터뷰 #첫 시집 『다른 명찰을 보여주는 관계자』 #아침달 출판사서 큐레이팅 과정 거쳐

이 시를 쓴 강이현 시인은 시 속 화자와 비슷한 사람이다. 자신이 놓인 세계에서 위화감을 느낀다. 이어 “정직하고 매끄러운 목소리”(아침달의 소개 글)로 그 감정을 태연히 맞닥뜨린다.

그가 여느 신인과 달리 독특한 구석이 있다면 시집 투고와 ‘큐레이팅’을 거쳐 작품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집 투고란 5편 내외의 시를 받는 일반적인 문예지·신춘문예와 달리, 곧바로 편집을 거쳐 출간될 수 있도록 시집 한편 분량인 약 40~50편의 시를 한꺼번에 투고 받는 방식.

올해로 44회인 민음사의 ‘김수영 문학상’, 10회를 맞는 계간 시산맥의 ‘동주문학상’을 포함, 아침달 출판사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다. 아침달은 편집·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던 손문경(46) 대표가 2013년 차린 한국문학 출판사. 2018년부터 시집 시리즈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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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현 시인의 첫 시집 『다른 명찰을 보여주는 관계자』 표지. 사진 아침달

지난달 10일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공용 화실에서 시인을 만났다. 강이현은 시인이기 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의 조형예술과 예술사(학사), 전문사(석사)를 거친 화가.

그는 “2018년부터 시를 쓰다 2019년에 처음 시를 투고하기 시작했다. 약 6년간 등단에 도전하고 여러 차례 실패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여름 투고한 50편의 시가 아침달 큐레이터들의 눈에 들어 연락을 받았다. 그 후 두 달간 큐레이팅, 일곱 달간 편집을 거쳐 낸 첫 시집이 『다른 명찰을 보여주는 관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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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현 시인이 강동호 화가로서 그리는 작품은 작은 것은 캔버스 3호 사이즈(27.3x22.0cm)부터 큰 것은 캔버스 80호 사이즈(145.5x112.1cm)까지 다양하다. 김성룡 기자

아침달에서 하는 ‘큐레이팅’ 과정이 궁금하다.  
“문예 창작이나 서사 창작 수업을 들어본 적 없다. 합평도 해보지 않았다. 아침달 큐레이팅을 통해 처음으로 학생의 위치가 되어 다른 분의 말씀을 귀담아듣게 됐다. 큐레이터인 정한아 시인께서 내가 일차로 묶어놓은 시집을 읽고 길게 피드백을 주셨다. 내가 가진 습관을 들춰내는 잔인한 메일이자, 첫 번째 독자가 보내는 따뜻한 조언이었다. 그렇게 나의 가능성을 초벌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아침달 큐레이팅 제도로 활동을 시작한 열 번째 신인이다. 새로운 원고에 애정을 보인 큐레이터가 등단 및 시집 출판 경력이 없는 신인을 발굴, 조력자로 일대일 소통하며 큐레이팅 과정을 거친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는 김소연, 김언, 유계영 시인이 큐레이터가 되어 이호준·조해주·윤유나·김선오·이제재 시인이 문단에 첫 발을 내디뎠다. 2023년부터 현재까지는 박소란, 정한아 시인이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이들의 큐레이팅을 거쳐 문단에 등장한 시인들이 김도·신수형·숙희·윤초롬·강이현 시인이다.

그림은 언제부터 그렸나.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입시 미술을 했다. 예술중학교와 예술고등학교를 거쳐 한예종에 진학했다. 그간 페인팅 작업은 꾸준히 해왔다. SNS에 작업물을 올리다 그걸 본 북촌의 킵인터치(Keep In Touch)라는 공간에서 전시 제안이 왔다. 그때가 대학교 3학년이었다. 2020년부터는 이태원의 휘슬 갤러리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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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현 시인이 그린 가장 최근의 작업물(왼쪽)과 시집. 지난달 그린 그림이다. 초파리 트랩이 컵케이크처럼 오독되는 모습이 재밌어 그렸다. 김성룡 기자

화가로서의 작업 방식이 궁금하다.  
“이미지가 오독(誤讀)되는 상황을 그린다. (사진에서 들고 있는) 이 그림도 초파리 트랩을 그린 것이다. 트랩에서 컵케이크처럼 다른 풍경이 보여 그렸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깃들어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서트 컷(Insert Cut, 특정 장면의 중요한 부분이나 세부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 끼워 넣는 짧은 이미지)을 상상하면 비슷하다.”
시를 좋아하고, 쓰기로 한 이유가 있다면.  
“미술 작업을 하던 학부 때부터 시를 썼다. 나에게 시는 일상 혹은 꿈에서 벌어진 일을 토대로 공상한 결과물이다. 그림을 그릴 땐 인터넷 속 이미지를 무작위로 건져 올려 작업하는 편이라, 나 자신보다 나의 시선이 강조된다. 줄곧 삶에 가까운 작업물은 그림보다 시라고 생각해왔다.”
좋아하는 시인은.
“좀 특이하다. 오규원 시인의 『현대시작법』(1990)이라는 작법서를 읽고 시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습작을 쓰다 번역 투가 시적 표현처럼 느껴져 프랑스 시인 프랑시스 퐁주, 독일 시인 파울 첼란, 미국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의 작업을 즐겨 읽었다. 한국 시인 중에선 이제니 시인의 『아마도 아프리카』(2010), 강보원 시인의 『완벽한 개업 축하 시』(2021)를 인상 깊게 읽었다.”
시가 회화작업과 닮았다. 행갈이를 덜 하는 등 독자의 오독을 유도하는 시가 많은데.    
“오규원 시인에 영향을 받아 무의미 시(의미나 대상의 형상화를 의도하지 않는 시쓰기 방식)를 쓰곤 한다. 예측할 수 없고, 움직이는 시를 쓰고 싶다. 독자들이 하나의 시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모습을 보면 즐겁다.”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
“매체마다 고유의 형식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형식을 탐구하는 과정을 즐긴다. 앞으로는 장시(長詩)를 써보고 싶다. 시를 읽기 전 소설도 많이 좋아했다. 단편소설을 쓸 기회가 있다면 도전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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