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미국처럼 철강 장벽 높이는 EU…한국 철강 ‘물량·가격·환율’ 삼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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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이어 유럽연합(EU)이 수입 철강 제품에 대한 무관세 쿼터(할당량)를 축소하고 품목 관세를 25%에서 50%로 높이기로 하는 등 무역장벽 높이기에 나서면서 한국의 철강 수출에도 작지 않은 타격이 우려된다. 8일 경기도 평택항에 철강 제품이 쌓여있는 모습. 연합뉴스

미국에 이어 유럽에서도 철강 관세 장벽을 대폭 높이기로 했다. 무관세 혜택을 받는 수입산 철강 물량을 크게 줄이고, 초과분에는 미국과 같은 수준인 50% 관세를 부과한다. 가뜩이나 미국의 관세 부과로 지친 한국 철강업계에게는 ‘엎친 데 겹친 격’이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7일(현지시간) 기존 철강 세이프가드를 대체할 저율관세할당(TRQ·Tariff Rate Quota) 제도를 공식 발표했다. 마로시 셰프초비치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세계적인 철강 과잉 공급은 시장을 왜곡하고, EU 산업 기반을 잠식하고 있다”며 “새로운 무역 방어 조치는 공정 경쟁을 위한 필수적 장치”라고 밝혔다.

TRQ는 일정 물량까지는 낮은(또는 0%) 관세를 적용하고, 초과분에는 높은 세율을 부과하는 ‘이중 관세’ 제도다. 수입은 허용하면서 시장 충격을 완화하려는 보호무역 수단이다. EU의 새 TRQ 제도에 따르면 기존 연 3053만t이던 무관세 수입 쿼터(할당량)가 1830만t으로 47% 축소되고, 초과 물량엔 기존 25%에서 50%로 두 배 높은 관세가 부과된다. 쿼터 산정 기준은 공급 과잉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2013년의 수입량이다.

또 모든 철강 제품에 ‘조강국 증빙 의무’가 신설된다. 최종 가공지가 아닌 실제 철강 생산국을 명시해야 낮은 세율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내년 6월 기존 세이프가드 만료 전에 입법 절차가 마무리되면, 조기 시행될 가능성도 있다.

기존 세이프가드 제도는 2018년 트럼프 행정부의 철강 관세(25%)에 대응해 EU가 도입한 긴급수입제한 조치다. TRQ와 비슷하게 국가별로 정해진 쿼터까지는 무관세로 수입을 허용하고, 초과분에는 25% 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이었다.

이번 TRQ는 사실상 기존 세이프가드를 강화한 형태다.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상 한시 조치인 세이프가드와 달리 장기 운영이 가능한 ‘관세 제도’로 못 박아 연속성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크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 교수는 “미국의 고율 관세 조치가 트리거가 되어 EU가 유사한 조치를 취한 첫 사례로, 다른 국가들도 연쇄적으로 따라올 가능성이 높다”며 “한국처럼 무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겐 직격탄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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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민 기자

당장 수출 판로부터 막힐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EU 철강 수출은 44억8000만 달러(약 6조4000억원)로, 미국(43억5000만 달러)과 비슷한 규모다. 지난해 약 393만t의 철강 제품을 EU로 수출했는데, 이 중 263만t은 한국에 배정된 쿼터, 나머지는 글로벌 쿼터를 활용해 전량 무관세로 수출했다.

그러나 지난 4월 EU의 세이프가드 조정으로 이미 타격을 받은 상황이다. 올해 1~8월 한국의 대(對)EU 철강 수출은 26억2000만 달러로 전년동기 대비 15.7% 감소했다.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EU는 미국과 함께 고부가가치 제품의 주요 수출시장이라 수출이 막히면 타격이 클 것”이라며 “인도·동남아 등은 저가 강판 위주라 대체 시장으로 활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아울러 EU가 향후 TRQ를 탄소 함량 기준이나 ‘그린스틸 인증’ 등 환경 규제와 연동할 가능성이 커, 고탄소 제품의 수출은 추가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한국 철강업계는 ▶EU 쿼터 축소로 인한 수출 타격 ▶최근 원화가치 급락(원·달러 환율 급등)은 물론 ▶건설 부진 등에 따른 내수 악화까지 ‘삼중고’에 처했다. 미국에 이은 EU의 철강 관세 ‘공격’으로 수출 시장이 흔들리고 있지만, 내수 역시 버팀목이 되지 못한다. 건설 경기 침체에다 중국산 저가 공세로 이미 철강 내수 시장은 이미 위기다.

산업통상부는 EU의 국가별 쿼터 확정 전까지 구체적 영향을 분석하며, 대응책 마련에 착수했다. EU가 국가별 물량 배분 시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에 대해서는 이를 고려하겠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만큼 산업부는 EU와 양자 협의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셰프초비치 위원과 협의를 추진하고, 문신학 차관은 이번 주 철강 수출 현장을 방문해 업계 의견을 청취할 예정이다. 오는 10일엔 민관 합동 회의를 열어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과 ‘EU 쿼터 확보 전략’을 논의한다.

철강업계는 EU 집행위가 국가별 수입 쿼터를 추후 개별 협상을 통해 결정하겠다고 밝힌 것에 주목하며 희망을 걸고 있다. 미국과 달리 협상을 통한 완화 여지가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박성훈 고려대 국제대학원 명예교수는 “EU 내부에서는 중국발 과잉 생산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어 한국까지 동일하게 묶일지는 지켜봐야 한다”며 “다만 독일 등에서는 이런 조치가 생산원가 상승으로 이어져 자동차·기계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재민 교수는 “미국은 일방적으로 방침을 정하고 압박하는 구조였지만, EU는 다자주의 체제 복원과 국제 규범 강화를 중시하는 만큼, 법리·외교 논거를 충분히 제시하면 협상 여지가 있다”며 “TRQ 적용도 국가별·품목별로 정교하게 설계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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