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세종 태어난 세종마을서 한글 간판 사라진다…95개 중 24개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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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마을 거리 한 건물 1층에 영어로 표기된 간판이 붙어 있다. 전율 기자

어? 저 간판 원래 한글이었던 것 같은데…

한글날인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마을에 온 이선호(30)씨가 맞은편에 있는 한 건물 간판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씨가 보고 있던 건물 1층엔 ‘baskin robbins’ 영어로 쓰인 간판이 있었다. 2년 전엔 ‘배스킨라빈스’라고 한글로 적힌 간판이 있던 자리였다. 해당 간판은 지난해 건물 리모델링 공사를 하면서 영문 간판으로 교체됐다고 한다. 이씨는 “몇 년 만에 세종마을에 왔는데, 영어 간판들이 많이 생긴 모습을 보니 씁쓸하다”며 “한글 간판들로 특별하게 느껴지던 거리 분위기가 깨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세종대왕이 태어난 서울 종로구 통인동은 경북궁의 서쪽에 있어 시민들에게 ‘서촌’(西村)으로 익숙한 곳이다. 지난 2011년부터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기리는 의미에서 간판 한글화가 본격화됐다. 상인 및 주민들은 ‘세종마을가꾸기’ 협회를 만들어 자발적으로 한글로 적힌 간판을 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날 경복궁역 3번 출구부터 통인시장 방향으로 이어지는 약 300m 거리의 대로변 간판 95개를 살펴보니 영어로 적힌 간판은 24개에 달했다. 한글 간판으로 가득했었던 거리의 25% 가량이 영문 간판으로 채워진 셈이다. 간판 한글화 작업이 마무리된 2014년 당시(1개)와 비교해보면 영문 간판 비중이 크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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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같은 자리에 있던 건물 간판의 모습. 한글로 '배스킨 라빈스', '파파이스'가 쓰여 있다. 네이버 지도 로드뷰 캡쳐

달라진 거리 풍경에 아쉬워하는 시민도 있었다. 이날 경복궁을 관람하러 온 김영신(68)씨는 “한글 간판이 영어로 바뀌니 우리나라 문화가 조금씩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안타깝다”며 “젊은 사람들은 영어를 잘 아니까 읽을 수 있는데, 우리 같은 노년층은 알아보기도 힘들다”고 했다.

외국인 관광객도 아쉬움을 표했다. 필리핀에서 여행 온 마리 제미노(28)는 “한글 간판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고, 여기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성과 분위기를 준다”라며 “로컬 언어로 쓰여 있는 간판이 훨씬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프랑스 국적 알렉스 도훈(41)도 “영어 간판이 읽기에는 수월하지만, 어차피 그림과 가게의 느낌만 보고도 어떤 곳인지 알 수 있다”며 “여행지의 기억이 남을 수 있는 간판이 많은 게 좋은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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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문화의 거리 모습. 대부분 가게에서 한글로 표기된 간판을 유지하고 있다. 전율 기자

서울 종로구 ‘인사동 문화의 거리’의 경우 세종마을보다 한글 간판이 훨씬 많다. 안국역 6번 출구에서부터 약 700m 동안 이어지는 거리에 있는 간판 127개 중 영문 간판은 8개(6%)뿐이었다. 세종마을에 있는 영문 간판의 즉석사진관의 경우 이곳에선 한글로 적혀있었다. 편의점 ‘GS25’도 ‘지에스25’라는 한글 간판이 달렸다.

옥외광고물법 시행령은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로 표시하고, 외국 문자로 표시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병기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한국어로 병기만 한다면 현행법상 외국어 간판을 제재할 수 있는 방안이 없다. 특허청 등록 상표의 경우 ‘특별한 사유’에 해당해 옥외광고물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 또 연면적 300㎡ 미만인 건물은 간판표시계획서를 제출할 필요가 없어 지방자치단체에서 간판의 모습을 미리 알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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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브랜드 편의점이지만,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한 편의점 간판은 '지에스25'로, 세종마을 편의점은 'GS25'로 표기하고 있다. 전율 기자

인사동의 경우 2003년 서울시 조례에 따라 ‘역사문화지구’로 지정되면서 자치구에서 지구 단위 관리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종로구는 옥외광고물 관련 규정을 별도로 마련하고, 상가에서 간판을 달 때 한글을 표기하도록 권고하도록 했다. 세종마을과 비교했을 때 영문 간판이 비교적 적은 이유다.

외국인 관광객에게 여행지의 첫인상을 줄 수 있는 만큼 한글을 사용한 간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국어문화원연합회 관계자는 “K-열풍이 한창인 요즘 한국에 관광 온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문화 상품 중 하나가 한글인데, 그런 것들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외국어와 병기를 하더라도 한글이 돋보이게 강조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관광객이 한글을 더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게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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