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학교서 받은 영국 식민지교육, 그땐 몰랐던 것들 [왕겅우 회고록(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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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는 날은 규율과 관습이 지배하는 밀봉된 세계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그곳에서 어울리는 친구들이 어떤 집안인지, 학교 밖에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학교를 나와 집에 돌아오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된다. 집에서 어머니는 나를 또 하나의 밀봉된 세계로 끌어들이셨다. 모든 인간관계, 특히 중국의 대가족 내의 인간관계가 명확하게 설명되는 세계였다. 아버지는 낮 동안 교사들과 그들의 문제들로 채워진 또 하나의 세계에 건너가 계셨으나 저녁 시간에는 내 중국어 교육을 살펴주셨다. 1936년 말에 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저녁 과외수업을 시작하셨다.
서로 다른 여러 세계에서 공부를 나란히 진행하는 데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30명이 넘는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받으며 선생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경쟁하며 공부한 실적의 평가를 받는 것은 긴장이 넘치는 일이었다. 앤더슨학교에서 나는 명확한 구조 속의 한 부분이 되었다. 제한된 숫자의 학생을 받는 학교로 한 학년에 한 반씩, 자기 교실을 갖고 있었다.
특별한 점은 인근 마을의 말레이 소학교를 마친 말레이 아이들로 구성된 두 개 반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말레이 아이들과 어울려 본 일이 없던 내게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학교에 그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5학년이 될 때까지는 마주친 일이 없었다. 말레이 소학교를 마친 아이들 중에서 장학생으로 뽑혀온 것이라고 들었다. 그 아이들은 2년간 영어를 따라잡은 후 본과 5학년 반으로 들어왔다.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고, 영국인과 말레이인 교사들이 감독하는 기숙사에서 살았다. 공부도 운동도 함께 하는 그들이 각종 운동회에서 상을 타 와 학교 명예를 드높이는 것을 우리는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영국 식민정책의 독특한 성과인 우리 사회적 배경의 복잡성이 그 아이들로 해서 더욱 부각되었다. 왜 말레이 아이들이 다른 대우를 받는지 그때 나는 이해하지 못했고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몇 해 후인 1941년 본과 5학년 반에 함께 다니게 된 그 아이들과 어울릴 때, 서로 친절하게 대하면서도 약간의 거리감을 느끼곤 했다. 자라나는 과정을 다른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했던 그들은 적응을 위해 별도의 노력이 필요한 전학생 같았다.
영국 정책 덕분에 자기네 나라에 온 부모들의 자식이면서 학교의 주인처럼 되어있던 우리를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이 질문을 해답도 찾지 않는 채로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 일본군의 말라야 침공 때까지 그 아이들과 별로 사귀지 못했고, 침공 후에는 뿔뿔이 흩어졌다가 영국인들이 돌아와 학교가 다시 문을 연 1945년 9월에야 급우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급우들은 전쟁 후 대부분 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말라야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실론과 마드라스의 고향으로 조용히 떠난 친구들이 꽤 있었다는 사실은 수십 년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인도에서 대학 공부를 하고 영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있었다. 후에 만났을 때 그들이 남아시아의 고향과 서방세계 사이를 어떻게 그리 쉽게 넘나드는지 신기했다. 더 지내면서 보니 남양에 일찍 건너온 집안의 중국인들도 여러 세계 사이를 쉽게 드나들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나 자신도 그런 조건을 갖추게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937년 앤더슨학교에 들어갈 때 교과과정은 영국 내의 교과과정을 조정해서 전 세계 영국 식민지에서 똑같이 쓰던 것이었다. 식민지 신민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이런 노력을 당시 알아채지 못한 것은 나 자신 학교 안팎에서 마주치는 서로 다른 여러 세계에 적응하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여러 해가 지나 지금은 영연방 회원국이 된 옛 식민지들을 다니면서 우리 세대가 모두 같은 책들을 읽으며 그 안에 담긴 사상들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내게 확실한 생각은 내 부모님의 고향인 중국이 바로 내 고향이며 머지않아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식민지교육의 주류에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잘 적응했다. 예과 2학년을 마친 후 본과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고 3학년을 거의 건너뛰어 한 학기 만에 4학년이 되고 겨우 4년 만에 본과 5학년이 되었다. 본과 2학년에서는 실론 출신의 사바라트남 선생님이 담임이었고 그 조카가 같은 반에서 친하게 지냈다. 크리시난 선생님이 무척 좋았는데 3학년에서 한 학기 동안만 배웠다. 4-5학년 때는 네 분 선생님을 더 만났다. 실론 출신의 모라이스 선생님, 펀자브 출신의 나라인 싱 선생님, 벵골 출신의 대단히 쾌활한 센 굽타 선생님. 그리고 신니아 선생님은 많은 자녀 중 셋이 나중에 싱가포르에서 대학을 함께 다니게 된다. 말레이인 선생님도 한 분 있었다. 지리를 가르친 모하메드 자인 선생님은 대단히 명랑한 분이었다. 그리고 중국인으로 미술과 목공을 가르친 친 선생님이 있었다.
학교 공부는 힘들지 않았다. 산수와 영어를 빼고는 별로 배우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이포와 페락 주가 어떤 곳인지에 관해서는 말레이인 술탄이 계셔서 우리 모두 형식적으로 그 신민이라는 사실 외에 배운 것이 없었다. 라자 무다 세자나 승계 서열 3위의 라자 벤다하라가 술탄을 대신해서 연례 운동회에 임석하고 상품을 수여할 때 경례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때나 떠올리는 사실이었다.
영국령 아닌 이웃 지역들에 관해서는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 중국이나 일본 얘기를 들은 것은 그 나라들 해역을 영국 배들이 주름잡는 이야기가 어쩌다 나오는 정도였다. 확실히 배운 것은 대영제국의 규모, 지도에 붉은색으로 표시된 곳 모두라는 것이었다. 그밖에는 스카우트 활동과 체육 활동이 장려되었다. 나도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어느 쪽에나 소질도 없고 열성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술-목공 선생님이 재능을 매우 중시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내 그림 솜씨를 보고 너무 실망하셨기 때문이다.
1941년 본과 5학년에 올라갈 때 학교에서는 2년 전 시작된 유럽전쟁을 모두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영국이 얼마나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지, 거대한 제국이 어떤 곤경에 처해 있는지 우리 모두 알게 되었다. 상급반 학생들이 간부후보생으로 행진 연습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고, 그중에는 지역 자위대에 들어가 가상적을 상대로 전투 훈련도 받았다고 한다.
나는 학교 밖의 생활 속에서 1937년 시작된 중국의 전쟁을 알고 있었는데 이 전쟁에 학교 친구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영국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국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는 훈련에 열의를 느낄 수 없었다. 1941년 말 막 본과 5학년 시험을 마칠 때 일본군이 말라야 침공을 시작하고 이포에 첫 포탄이 떨어졌다. 두 전쟁이 마침내 합쳐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살던 여러 개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고 모든 사람이 같은 운명 앞에 서게 되었다. 1936년 이래 내 정식 교육의 중심 무대였던 학교를 떠나면서 전혀 다른 세상의 생활로 넘어가는 계기이기도 했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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