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찰청 검사입니다. 귀하의 재산이 마약 거래로 번 범죄수익이 아니라는 걸 입증하려면 지금 송금하셔야 합니다.”

지난 3월 미국 플로리다에 거주하던 교민 A씨는 이 한 통의 전화를 받고 3억 원을 넘겼다. 걸려온 전화는 다름아닌 주미 한국 대사관 대표번호였고, 수화기 너머의 인물은 “검찰 수사 중”이라며 웹사이트 링크를 보냈다. 이는 사실 보이스피싱 조직이 치밀하게 설계한 함정이었다. 사건은 한국 경찰과 미국 FBI 신고로 이어졌고 계좌 지급정지 조치가 이뤄졌다.

지난 9월 서울 종로구 통합신고대응센터에서 직원이 전화 상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1~9월) 외교부에 접수된 재외공관 사칭 보이스피싱 피해는 23건. 지난해 1건에서 급증한 수치다. 특히 지난 3월 한 달 동안 피해가 집중됐다. 같은 달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도 보이스피싱범이 주LA 총영사관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 자신을 “총영사관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실제 총영사관에 근무 중인 직원의 이름까지 댔다고 한다. 이들이 “검찰청 마약 사건으로 수배된 상태”라고 협박하자 교민 B씨는 전송받은 링크에 개인정보를 입력했는데 실제 B씨의 이름이 적힌 구속영장이 화면에 떴다. 범인들은 “의심스러우면 경찰청에 직접 확인하라”며 인스타그램을 활용한 영상통화까지 연결했다. 실제 경찰서를 배경으로 경찰 복장을 입고 계급장을 단 인물이 등장했지만 이는 모두 조작된 모습이었다.

일본 요코하마에 거주하는 교민 C씨도 같은 달 비슷한 수법에 당했다. “베트남 마약조직 사건에 당신 계좌가 이용됐다”며 한국 검찰청 직원을 사칭한 범인이 실명과 주소까지 정확히 언급하자 C씨는 의심을 거두었다. 상대가 보낸 검찰청 사이트를 믿고 1000만 원과 400만 엔 등 약 5000만 원을 송금했다. ‘한국 정부기관 관계자’를 사칭한 이들은 송금 후에도 “금액이 너무 적다”며 추가 입금을 재촉했고 “일본 경찰과 공조 중”이라며 압박을 가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도 같은 달 ‘오타와 대사관’ 발신 번호로 걸려온 전화가 또 다른 교민 D씨를 노렸다. '한국 검찰청 검사'를 사칭한 범인은 개인정보와 금전을 요구해 약 650만 원을 빼앗았다.

심지어 대면 편취까지 벌어졌다. 지난 6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E씨는 주뉴욕 총영사관 대표번호와 서울경찰청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서 “은행 횡령사건에 당신 계좌가 이용됐다”는 말을 들었다. 범인은 암호화폐 송금(7만4000달러·1억582만원 상당)과 함께 “증거 확보용”이라며 6억 원 상당의 고급시계를 구매하도록 지시했다. E씨는 7월 뉴욕에서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백발 노인에게 직접 시계를 전달했다.

정부서울청사의 외교부 로고. 연합뉴스

지난 3월 집중적으로 발생한 재외공관 사칭 보이스피싱은 해외 거주 피해자의 이름, 전화번호, 거주지 정보를 미리 파악한 뒤 범행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한층 교묘해졌다. 이들은 공관 대표번호를 도용하고, 정부기관 로고를 무단 사용한 문서나 웹사이트를 만들어 신뢰를 유도했다. 최근에는 영상통화를 이용해 ‘수사기관’을 가장하는 수법까지 등장했다.

외교부에 따르면 올해 1~9월 사이 보고된 23건 중 미주 지역이 16건으로 가장 많고, 유럽 5건, 아시아·태평양 2건 순이었다. 대부분 미국·캐나다 등 북미 지역에서 피해가 집중됐다.

외교부는 “공관 사칭 범죄가 급증함에 따라 재외국민 대상 예방 홍보를 강화하고 해외 수사당국과 공조체계를 구축 중”이라며 “북미 지역 영사 회의에서도 대책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김건 국민의힘 의원은 “재외공관은 해외에서 우리 국민의 마지막 보호막인데 이를 사칭한 범죄는 국가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라며 “외교부는 단순 주의 공지를 넘어 해당국 수사당국과 긴밀히 협력해 적극적인 단속과 처벌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