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사우디 원전 수주 노린 한국에, 자국모델 들이민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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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섭 커지는 원전 수주전

사우디아라비아 원자력발전소 수주에 나선 한국을 겨냥해 미국식 원전 모델을 채택하라고 미국 정부가 압박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는 수용 여부를 놓고 저울질 중이다.

15일 정부와 원전 업계 등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에너지 장관 회담 참석차 방한한 제임스 댄리 미국 에너지부 차관이 한국 정부와 한국전력 고위급 관계자를 만나 사우디 원전 수주전에서 미국식 원전 모델 수출을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한전과 한국수력원자력 등으로 구성된 ‘팀코리아’는 사우디아라비아 원전 수주에 공을 들이고 있다. 여기서 한전의 독자 수출 모델인 ‘APR1400’ 대신 웨스팅하우스의 ‘AP1000’를 채택하라는 요구다.

서왕진 조국혁신당 의원은 지난 13일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부 국정감사에서 김정관 산업부 장관에게 “한전이 오는 11월 사우디 원전 입찰에 참여하는데, 미국 정부가 웨스팅하우스의 대형 원전(AP1000) 모델로 노형을 변경하고, 한전과 웨스팅하우스가 공동 수주하도록 요구했다는 제보가 있다”고 질의했다.

이에 대해 김 장관은 “현재 사우디 프로젝트와 관련해 다양한 협의가 진행 중이며, (한전의 모델인) APR1400을 포함한 여러 수출 옵션이 검토되고 있다”고 즉답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APR1400도 미국의 기술 허가 없이는 수출이 어려운 구조임을 인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 원전 업계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이런 제안은 실제 있었다. 한국이 단독으로 사우디 원전 사업을 수주하는 걸 저지하고, 웨스팅하우스가 참여할 수 있도록 압박하려는 의도다. 서 의원은 “이는 명백한 부당 간섭”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은 이미 APR1400 모델로 원전 수출 공급망을 구축해뒀다. 첫 수출인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프로젝트에 이어 올해 6월 계약한 체코 신규 원전 2기 역시 APR1400으로 공급한다. APR1400가 아닌 새로 공급망을 구축해야 하는 AP1000 모델로 추진하면 공기가 길어지고, 건설 비용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난 1월 한전·한수원과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체결한 합의문에 따르면 한국은 원전을 수출할 때 웨스팅하우스와 1기당 6억5000만 달러(약 9300억원) 규모의 물품·용역 구매 계약을 맺고, 1기당 1억7500만 달러(약 2500억원)의 기술 사용료를 내기로 했다. 미국이 AP1000 프로젝트 공동 추진을 제안하고 나선 건 한국으로부터 얻는 경제적 이득뿐만 아니라 향후 원전 생태계의 주도권까지 놓지 않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미국은 원전 설계 등 원천 기술 강국이지만,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이후 신규 건설 인허가가 중단되면서 원전 건설 능력을 사실상 상실했다. 설계·조달·시공(EPC)에 강점을 가진 한국 기업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의미다. 만약 한국이 사우디에서 AP1000 건설을 추진하고, 부품 등 AP1000 관련 공급망을 새로 구축하면 추후 미국 내 원전 건설 때도 이를 활용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50년까지 현재 약 100GW(기가와트)인 미국 내 원전 설비용량을 400GW로 확대하겠다는 장기 목표를 내걸었다. 한 원전 업계 고위 관계자는 “미국 중심의 국제 원자력 통제 체제 속에서 한국이 제안을 무시하고 독자 수출에 나서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정부도 수용 여부를 고심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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