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한국인 써야 한국인 잘 속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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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프랜차이즈 사업을 했던 임찬우(40대·가명)씨는 지난 1월 동생 같은 후배 A씨(30·배달기사)로부터 함께 캄보디아 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마침 사업 휴식기여서 선뜻 따라나섰다. 하지만 이 여행이 63일 동안의 범죄단지 감금 생활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A씨는 여행 직전 “초등학교 동창”이라며 동행할 친구를 소개했다. 별 의심은 하지 못한 채 비행기에 올랐다. 베트남 호찌민 공항에 내려 캄보디아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호찌민에 도착하자마자 A씨 친구가 사라졌다. 대신 중국인 1명과 한국인 1명이 탄 검은색 승합차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알고 보니 동행한 A씨 친구도 캄보디아 보이스피싱 조직의 ‘한국인 브로커’였다.

조직원들은 베트남 국경을 육로로 통과했고, 16일 정부가 ‘여행금지’ 지역으로 지정한 캄보디아 캄폿주 바벳의 범죄단지(웬치·园区)로 임씨 일행을 끌고 갔다. 겉보기엔 평범한 4층짜리 연립주택이었지만 내부는 1~3층까지 숙소, 4층은 보이스피싱 사무실로 쓰였고 비슷한 건물이 17동이나 있었다. 임씨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여권과 휴대전화를 빼앗겼다.

범죄 조직이 임씨에게 시킨 일은 ‘로맨스 스캠(연애 빙자 사기)’이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일을 시키고 약 300만원의 월급도 줬다. 임씨는 “함께 일하던 한국인만 35명이었다. 17동 전체로 보면 다른 나라 사람까지 포함해 적어도 2000명은 있는 것 같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중국인이 했는데, 일일이 번역기를 돌려야 해 작업 효율이 떨어지자 한국인을 직접 납치해 일을 시키는 구조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인을 써야 한국인을 잘 속이니까”라고 설명했다.

그는 탈출을 해보려고 대사관에 전화도 해봤지만 ‘직접 경찰에 신고하라’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임씨는 “신고한 게 발각되면 바로 죽는다. 조직과 경찰은 다 연결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직의 지시에 순응하는 척하며 신뢰를 얻었고, 외출 기회가 생긴 날 미리 부른 프놈펜행 택시에 몸을 실어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귀국 후 임씨는 사기 가담 혐의로 경찰 조사도 받아야 했다. 그는 “돈을 받으면 한국 와서 잡혀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받지 않았다. 주변 한국인들한테도 받지 말라고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함께 감금됐던 A씨는 관련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임씨는 “자발적으로 간 사람도 많지만, 속아서 간 사람들도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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