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한국인 160만명 몰리는 다낭도 비었다, 재외공관장 42곳 공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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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넉 달이 넘었지만, 외교 현장이 ‘지휘관 없는 전초기지’가 돼 가고 있다. 당장 온라인 사기 연루 한국인 피해가 급증한 캄보디아를 비롯, 173개 재외 공관 중 약 4분의 1 정도가 공관장 공석 상태로 나타났다. 재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걸린 최전선을 책임질 장수가 없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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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당국의 범죄단지 단속으로 적발돼 구금됐던 한국인들이 지난 18일 인천공항을 통해 송환되는 모습. 공동취재단. 뉴스1

20일 외교부와 김건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외교부의 173개 재외공관 중 현재 대사 공석이 25곳, 총영사 공석은 17곳으로 총 42개 공관이 리더십 공백 상태다. 지난 6월 말 미국·일본·러시아·유엔 등 주요 특임 공관장들에게 후임자 인선 없이 ‘2주 내 이임’을 지시한 데다 이후 인사 절차가 지연되면서 공백이 장기화하고 있다. 일부는 윤석열 정부 때부터 공석인 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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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민 기자

대사가 공석일 경우 차석이 대사대리를 맡는 대행 체제가 가동된다. 공식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아무래도 정식 대사보다는 무게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국민이 범죄 피해를 당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접촉할 수 있는 주재국 정부 인사의 급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캄보디아만 하더라도 한국인 대학생 박모씨가 고문 끝에 사망하는 사건은 지난 7월 박정욱 전 대사가 귀임한 뒤 후임 인사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특히 공관장이 없는 42개 공관 중에는 재외동포 30만 명을 관할하는 뉴욕 총영사관과 12만 명을 관할하는 오사카 총영사관도 포함된다. 두 공관 모두 지난 7월 윤석열 정부에서 임명된 특임공관장이 이임한 뒤 자리가 비었다.

한 해 한국인 관광객이 160만 명 이상 찾아 '경기도 다낭시'로 불리는 다낭 총영사관도 지난 7월 중순 전임 총영사가 떠난 뒤 대행 체제다. 이 밖에도 삿포로·후쿠오카 등 한국인이 몰리는 지역의 총영사도, 워킹홀리데이 인원과 유학생이 많은 호주 대사 자리도 비어 있다.

더불어민주당 윤후덕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에서 사건·사고 피해를 본 한국인은 1만 7283명이었는데, 일본(2348명)과 베트남(1767명)이 1·2위였다.

아직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하마스와 전쟁을 이어가고 있는 이스라엘도 지난 7월 전임 대사가 떠난 뒤 대사 자리가 비어 있다. 이달 초에는 한국인이 탄 선박이 가자지구로 향하다 이스라엘 당국에 나포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런 공백을 채우기 위해 서두르는 기류는 포착되지 않는다. 이재명 정부 들어 새로 임명한 공관장은 강경화 주미·이혁 주일·노재헌 주중·차지훈 주유엔대표부 대사 뿐이다.

러시아에는 이석배 전 러시아 대사가 다시 내정됐지만, 아직 부임하지 않았다. 지난 7월 이도훈 전 대사의 이임 뒤 북·중·러가 중국 베이징(9월 3일 열병식)과 평양(10월 10일 열병식)에서 결집하는 대형 외교 이벤트가 벌어졌지만, 현지에서 기민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러시아 당국과 접촉해야 할 주러 대사는 없었다.

캄보디아의 경우 외교부는 지난 14일에야 뒤늦게 ‘캄보디아 취업 사기·감금 피해 대응 태스크포스(TF)’를 발족하고 박일 전 레바논 대사를 TF 팀장으로 급파했다. 박 전 대사를 임명에 다소 시간이 걸리는 대사가 아닌 대사대리로 보낸 '땜질 인사'는 캄보디아 강력 범죄가 큰 관심을 모으기 전까지 후임 임명에 손놓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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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현지시간) 캄보디아 프놈펜 인근 온라인스캠범죄단지인 태자단지. 뉴스1

공관장 인사 지연은 외교부 본부의 핵심 보직 인사와도 맞물려 있다. 각종 다자회의에서 고위급 대표 역할을 맡는 차관보(1급) 자리는 정병원 전 차관보가 물러난 뒤 두 달 넘게 비어 있다. 한·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협력에서 초국경 범죄 대응이 주요 의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대(對) 아세안 고위급 외교의 한국 측 수석대표인 차관보가 공석인 셈이다.

이에 외교부에서는 북미국장이 차관보 직무를 대행하는 초유의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달 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국빈 방한의 주무를 맡고 있는 북미국장이 차관보 역할까지 맡는 것은 비정상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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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4일(현지시간)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HSI) 등 소속 요원들이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이 조지아주 서베나에 공동으로 건설중인 배터리 공장에서 현장 직원들의 몸과 다리를 수갑과 쇠사슬로 묶고 있는 모습. ICE 동영상 캡처

북·미 정상 간 깜짝 회동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데, 정작 미국과 대북 정책을 조율하는 외교전략정보본부장(차관급) 자리도 두 달 넘게 공석이다. 외교전략정보본부의 전신인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출신인 김건 의원은 “트럼프 행정부와 한반도 정책을 조율할 카운터파트가 사실상 전무하다”며 “외교부 주요 보직과 공관장 공백은 단순한 인사 지연이 아니라 외교 네트워크 전반을 마비시키는 구조적 리스크로 작용해 한·미는 물론 주요국과의 양자 협의 채널까지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작 인사 업무를 총괄하는 기획조정실장(1급)도 공석이다. 전임 배종인 실장은 최근 법조인 출신인 차지훈 신임 주유엔 대사를 보좌하기 위해 주유엔 차석대사로 재기용됐다. 유엔 차석 대사 자리를 시차를 두고 동일 인물이 다시 맡는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이재명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변호인 출신으로 외교 경험이 전무한 차 대사를 지원하기 위한 무리한 인사라는 비판이 따라붙었던 이유다.

이런 비정상적 상황을 연쇄적으로 낳고 있는 공관장 공백 사태를 두고 외교가에서는 ‘보은 인사’ 때문 아니냐는 뒷말까지 나온다. 정치인 출신 공관장 자리를 확정하지 못하면서 직업 외교관들의 배치까지 미뤄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객관적인 공관의 수요보다는 정치인이나 캠프 출신 인사들을 어떤 주요 공관에 나눠 배치할지 따지느라 시간이 소요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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