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200년전 입센이 들춰낸 사회적 억압…여전히 배회하는 ‘유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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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이 객석으로 둘러싸인 하얀색 바닥에 소품은 세 개의 검은 의자. 연극 ‘유령들’의 배경은 19세기 노르웨이 저택이지만 무대는 작고 단순하다. 그래서 오히려 배우들의 대사와 감정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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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프로젝트가 제작한 연극 '유령들' 공연 장면. 사진 LG아트센터

지난 16일 서울 강서구 마곡동 LG아트센터 U+스테이지에서 개막한 연극 ‘유령들’은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1881년 발표한 희곡을 원작으로 했다. 노르웨이어 원제는 ‘Gengangere(갱강어, 돌아오는 자)’이다. 사라지지 않고 돌아오는 현상을 뜻하는데, 입센은 이 용어를 세대를 지나서도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 관습, 관념 등을 겨냥해 사용했다. 특히 19세기 당시 개인의 삶을 옭아맨 낡은 도덕과 종교를 비판했다. 금기시된 성병과 근친상간, 안락사와 같은 예민한 소재를 다룬 탓에 공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부유한 미망인 알빙 부인이 죽은 남편의 이름을 딴 고아원을 열기 전날 부인의 저택에서 벌어진 일이 주요 줄거리다. 고아원 사업을 담당하는 만데르스 목사, 아들 오스왈, 목수 엥스트란드, 하녀 레지나가 드나들며 그동안 감춰진 추악한 진실이 드러난다.

‘유령들’은 박지혜 연출과 배우 손상규·양조아·양종욱으로 구성된 창작집단 양손프로젝트가 제작했다. 연출과 배우로 구분하긴 했지만, 작품 선정부터 각색·연출·연기 등 전 과정을 네 명이 함께하는 공동창작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전락’, ‘데미안’ 등을 통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 명의 배우가 5명 역할을 나눠 맡았다. 양조아가 알빙 부인을 전담하고, 손상규가 오스왈과 목수 야코브 엥스트란드를, 양종욱이 만데르스 목사와 레지나를 번갈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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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센 3부작' 중 첫 작품 '유령들'을 무대에 올린 양손 프로젝트 멤버들. 손상규, 양조아, 박지혜, 양종욱(왼쪽부터). 사진 LG아트센터

순간순간 다른 배역으로 변하는 배우의 표정과 말투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양종욱은 “각색 과정을 오래 거쳤고 그 과정에서 캐스팅이 계속 바뀌기도 했다”고 말했다.

미니멀한 무대를 배우의 힘으로 채워내는 양손프로젝트 특유의 공연 방식은 이번 작품에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양조아는 “한 면 무대와 달리 4면 무대는 배우 입장에서 숨을 곳이 없다”며 “이런 무대 덕에 알빙 부인이 받을 압박감이 더 잘 느껴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의 소재인 성병, 근친상간 등은 원작에선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유령들’에선 적나라하게 표현됐다. 박지혜는 “고전의 중요한 상징과 문학적인 표현들이 있긴 하지만, 최대한 우리가 실제로 주고받는 말처럼 각색하려 했다”며 “당시에는 금기인 탓에 원작은 돌려서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부분을 감추지 않고 직설적으로 드러내려 했다”고 말했다.

‘유령들’은 오는 26일까지 관객을 만난다. 연극계 ‘히트 메이커’로 통하는 양손프로젝트 작품답게 티켓 오픈 당일 약 1시간 만에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박지혜는 “200년 전 사람들을 억눌렀던 ‘유령’ 같은 사회적 시선과 비난의 공포가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양손프로젝트는 ‘유령들’을 시작으로 ‘입센 3부작’을 매년 한 편 씩 올릴 계획이다. 손상규는 “입센은 날카로우면서도 군더더기가 없고, 미사여구 같은 장식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로 직진하는 느낌이 있다”며 “그게 저희 취향과도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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