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한 “150억” 미 “250억”…막판 협상 줄다리기
-
12회 연결
본문

미국과 막바지 관세협상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가운데)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오른쪽)이 22일(현지시간) 워싱턴DC의 상무부 청사에서 하워드 러트닉 장관과 협상을 마친 뒤 이동하고 있다. 이날 김 실장은 “일부 진전이 있었다”고 밝혔다. 강태화 특파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한·미 양국이 진행한 22일(현지시간) 마지막 고위급 대면 회동에서 무역 협상의 결론을 내지 못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일부 진전이 있었지만 논의를 더 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 16일에 이어 엿새 만에 미국을 재차 방문해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만난 2시간 동안의 협상을 끝낸 뒤 기자들과 만나서다.
김 실장은 “남아 있는 쟁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며 “(협상이) 막바지 단계는 아니고, 협상이라는 건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잔여 쟁점이 “아주 많지는 않다”고도 했다.
23일 중앙일보의 취재를 종합하면 3500억 달러(약 500조원) 대미 투자 패키지의 자금 구성 투자 집행 기간 등의 세부 이견 조율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현금’ 중심의 선불 납입 방식은 외환 여력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설명했고, 미국이 이를 일부 수용하면서 협상은 최근 속도를 냈지만 매듭을 짓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대미 투자 펀드 가운데 ‘에쿼티(equity·직접 지분 투자)’ 비율은 최소화하고 론(loan·대출), 개런티(guarantee·보증) 비율을 늘린다는 방침이다. 일단 미국 측은 기존의 ‘3500억 달러 현금 선불(capital-upfront) 투자’ 요구에선 한발 물러섰다.
자금 구성과 투자 기간은 맞물려 있다. 현금 비중이 확정되면 외환 조달 능력에 따라 투자 기간이 조정되는 구조다. 미국은 한국의 현금 투자 금액을 2000억 달러(약 290조원) 선으로 하고, 연간 200억~250억 달러 이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 연간 150억 달러(약 22조원) 안팎의 분할 투자가 최대치라는 입장으로 전해진다.
한국의 요구는 외환시장을 고려한 판단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국회 국정감사에서 “외환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고 조달 가능한 외화 규모는 연 150억~200억 달러 수준”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국의 요구대로라면 투자 마무리까지 10년 이상이 필요하지만, 미국이 요구하는 수준으로 맞추려면 분할 납부 기간이 훨씬 짧아진다.
통화스와프(양국 통화 맞교환 협약)와 투자 배분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이날 공개된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직접 투자, 대출, 보증이 혼합된 형태의 균형 잡힌 투자 패키지를 구성하는 데 협상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며 “통화스와프가 필요한지, 또 어느 정도 규모로 추진될지는 전적으로 협상 구조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협상팀 “3500억 달러 감액은 불가능…기간 연장이 현실적”
여기에 투자처 선정, 수익 배분 문제가 맞물려 있어, 한·미 양국 간 고차방정식 협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한국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협상팀 관계자는 이날 통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3500억 달러의 투자 유치를 정치적 성과로 내세운 상황에서 투자금 총량을 줄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한국의 입장에선 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납입 기간을 늘리고, 투자처를 정할 때 한국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방안이 그나마 현실적이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와 관련해 대통령실은 이날 공지를 통해 “한·미 관세협상은 아직 진행 중이며, 금융패키지의 구체적 운영 방식은 확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협상 내용에 대한 여러 전망과 추측이 나오지만 이미 지나간 얘기가 대부분”이라며 “지금은 잘못된 보도에 대응하는 것조차 우리 협상 전략을 노출할 우려가 있어 극소수만 협상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실장은 이날 추가 장관급 논의가 이뤄질지에 대해 “만나기는 어렵다. (필요하다면) 화상으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무역 협상이 이미 참모들 간의 논의 수준을 넘었고, 결국 경주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릴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이 사실상 ‘정치적 결단’의 형식으로 마무리할 가능성을 시사한 말로 풀이된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관세협상이 최종 타결되면, 지난 8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상당 부분 이견을 좁힌 안보 협상 결과도 함께 공개하는 ‘관세·안보 풀 패키지’ 발표 가능성이 크다. 양국은 ‘동맹의 현대화’ 이슈를 포함해 국방비 증액,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과 관련해 상당 부분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래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논의 개시도 임박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이날 MBC 라디오 인터뷰에서 “안보 차원이 아니라 산업적 차원에서 연료를 만들기 위해 우라늄 농축을 해야 되고,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재사용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요구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졌다”며 “협상을 곧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만 대통령실은 관세협상 기한을 한·미 정상회담 이후까지 열어놓는다는 방침이다. 시한에 쫓겨 불리한 합의를 하기보다는 정상회담을 협상의 레버리지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공개된 CNN과의 인터뷰에서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미 통상 협상을 타결할 수 있냐’는 물음에 “조정·교정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고 답했다.
이 대통령은 다만 “우리는 결국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결과에 이르게 될 것”이라며 “우리는 동맹이고, 모두 상식과 합리성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장관급 논의는 이어지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최종 결단이 나오지 않아 협상이 교착 상태에 있다”며 “다만 양국 모두 협상 장기화가 부담인 만큼, ‘공동성명(Joint Statement)’ 형태의 형식적 진전 연출 가능성은 있다”고 전망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