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반도체 빼면 '마이너스 수출'...사천피 넘겨도 내린 종목 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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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착시에 갇힌 한국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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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남미가 기자

“장사요? 그냥 그래요. 정부가 소비 쿠폰 나눠줬을 때 잠깐 느는 것 같더니 제자리로 돌아왔어요. 경기가 이러니 여기도 빈 상가나 사무실이 채워지지 않고 있어요.” 직장인이 많은 서울 강남구 역삼동 먹자골목의 한 사장이 하는 하소연이다. 계속되는 불황 여파 속에 겨우 버티고 있다고 했다. 고금리·고물가에 이어 소비 위축까지 겹치면서, 매출은 줄고 대출 이자 부담은 커져 버틸 힘이 고갈된 자영업자가 속출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과의 관세 협상 난항 속에서도 9월 역대 최고 수출을 기록했다. 코스피는 최근 사상 처음으로 4000선을 돌파한 뒤, 이제는 5000선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3분기에는 깜짝 성장세를 보이기도 했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28일 발표한 3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분기 대비 1.2%(속보치)로, 시장 예상치(1.1%)를 웃돌았다. 이 덕에 올해 한국 경제가 0%대 저성장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그런데 기업이나 국민이 느끼는 체감 경기는 다르다. 한은이 지난달 29일 발표한 10월 전(全)산업 기업심리지수(CBSI)는 90.6으로 전월보다 1포인트 하락했다. CBSI는 경제 전반에 대한 기업의 인식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지수로, 수출 호조에도 기업은 경기가 나아졌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11월에도 나아질 것 같지 않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11월 기업경기실사지수(BSI) 전망치는 기준선인 100을 밑도는 94.8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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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사라지지 않고 있고, 내수 경기가 위축된 영향이다. 서민들의 삶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불황형 대출’로 불리는 신용카드 대출(현금서비스·카드론)은 8월 말 기준 44조7850억원에 이른다. 특히 이 가운데 1개월 이상 연체된 금액은 1조4830억원으로 2023년 9830억원, 2024년 1조940원보다 급증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수출 증가와 정부 지출로 올해 0%대 성장은 면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한국경제의 구조적 회복세로 보기는 힘들다”고 진단했다.

경제 지표와 체감 경기의 괴리는 ‘반도체 착시’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인공지능(AI) 투자 열풍으로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반도체 수출이 증가하고 반도체에 증시 자금이 몰리면서 표면적으로는 한국 경제가 ‘호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수출만 해도 반도체를 걷어 내면 상황이 썩 좋지 않다. 올해 들어 8월까지 한국의 누적 수출액은 4538억27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4499억1700만 달러를 뛰어넘었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3495억3300만 달러로 지난해 9월보다 2.8% 감소했다.

석화 구조조정, 2차전지·조선 지원책 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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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남미가 기자

화공품(-8.0%)·자동차부품(-5.6%)·기계(-5.0%)·철강(-3.8%) 등 제조업 대부분이 역성장했다. 월별 수출액 역시 7월과 8월 각각 5.8%, 1.2%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7월 -0.3%, 8월 -5.5%로 부진이 심화하고 있다.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 확대했다. 8월까지 반도체 수출액은 1042억94만 달러로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3%에 이른다. 2023년까지만 해도 전체 수출액의 15.9%였던 반도체 비중은 지난해 21%로 올라선 데 이어 올해 더 확대된 것이다.

증시도 상황이 비슷하다. 한국거래소 집계 결과 코스피가 3000선 재돌파한 6월 20일부터 지난달 24일까지 코스피는 30%가량 급등했지만, 같은 기간 내린 종목은 1537개로 오른 종목 1104개보다 400개 이상 많았다. 이 기간 하락 종목이 상승 종목보다 많았던 날은 52일로, 상승일보다 오히려 잦았다. 즉, 지수는 치솟았지만 상당수 종목은 제자리걸음을 했거나 뒷걸음을 했다는 의미다. 특히 대형주 중심으로 구성된 ‘코스피200’에서도 소수 종목 쏠림이 뚜렷했다. 6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코스피200은 64.7% 올랐지만, 이 상승률을 웃돈 종목은 200개 중 41개(20.5%)에 불과했다.

나머지 160여 종목은 평균에도 못 미쳤다. 일부 반도체와 AI 초대형주가 지수를 끌어올린 결과다. 지난달 29일 기준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594조9236억원으로 코스피 전체의 15.51%에 이른다. SK하이닉스 시가총액은 406조2253억원(10.59%)으로 삼성전자의 뒤를 이었다. 두 종목의 시가총액 비중은 코스피 전체의 26.10%로 8월 29일 20.01%보다 6.09%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여기에 삼성전자 우선주(65조1963억원·1.70%)를 더하면 비중은 27.80%까지 오른다. 서상영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지수를 이끌고 있지만 중소형주는 여전히 부진하다”며 “미국의 경기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K자형 경제가 나타나고 있고, 한국 증시도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반도체가 경기에 따른 부침이 심한 업종이라는 점이다. 특히 한국 기업이 주력으로 삼은 메모리 분야가 대표적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2년 전인 2023년만 해도 가격이 급락한 D램 등 메모리 반도체 재고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삼성전자는 2023년에만 반도체 부문에서 수조원대 적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시장에서는 반도체 업황이 수요가 급증하는 ‘수퍼사이클’에 진입했다는 분석이 나오지만, 마냥 낙관하기는 어렵다. 조원경 UNIST 교수(글로벌 산학협력센터장)는 “최근 미국에서는 AI 투자와 주가에 거품이 끼었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며 “AI가 기술적 한계에 부딪히거나, 수익성 논란으로 투자가 줄면 반도체 수요도 급감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체 수출액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한은은 지난달 23일 ‘최근 수출 및 경상수지 상황에 대한 평가와 전망’ 보고서를 통해 “반도체 수출이 그간 미국 관세 충격의 부정적 영향을 완충해 왔다”면서도 “그 과정에서 의존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향후 반도체 경기가 하강 국면으로 전환하면 경제 전체에 미치는 파장이 예전보다 클 수 있다”고 밝혔다. 반도체가 무너지면 한국경제가 휘청일 수 있다는 경고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쏠림 속도를 늦추려면 결국 경제 체질 개선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정책 초점을 단기 부양책이 아니라 연구·개발(R&D), 인적자원, 신산업 전환 등 생산성 기반의 경기 부양책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불황형 대출’ 카드빚 연체 1.4조원대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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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남미가 기자

이와 함께 석유화학 구조조정 서두르고, 2차전지·조선 등에 대한 지원도 강화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중국의 저가 공세에 휘청이고 있는 석유화학은 연말까지 기업 간 자구계획안을 제출해야 하지만, 논의는 답보 상태다. 기업 간 주요 시설을 사고팔고 해야 하는 만큼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석유화학업계 한 관계자는 “업계 자율로 맡겨 둬서는 골든타임을 놓칠 가능성이 크다”며 “정부가 각사의 안을 받아 조율과 중재에 나서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한국 경제의 새로운 먹거리인 2차전지에 대한 지원 강화도 필요하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1~8월 국내 완성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의 세계 시장 점유율 37.8%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1%포인트나 하락했다. 한국이 잃은 시장은 대부분 중국 기업이 차지했다. 중국은 배터리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해 정부가 대규모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은 세액공제 등 간접지원 정도에 그치고 있다. 김세호 LG경영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배터리 산업의 경쟁은 기업 경쟁에서 국가 시스템 경쟁으로 변모하고 있다”며 “한국 배터리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동등한 조건으로 경쟁하기 위해서는 파격적인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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