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고전한문 중시한 아버지, 논어·맹자 경전 건너뛴 이유 [왕겅우 회고록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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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천사 / Town Boy
내가 밍테 학교를 그만둔 후 아버지는 내 공부가 걱정되셨다. 그래서 주변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공부방을 만들어 나를 넣으셨다. 열 명가량이 매주 세 번, 대개 늦은 오후에 모였다. 아버지가 고전한문을 가르치셨다. 고전한문을 잘 읽고 잘 쓰도록 가르치는 일을 아버지는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다. 우리 모두 삼자경(三字經)과 천자문(千字文)은 떼고 거기 나온 한자는 대개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아버지는 가정하셨다.
〈고문관지(古文觀止)〉로 시작하셨다. 중국의 가장 유명한 산문 작품들을 모은 책이다. ”도화원기(桃花源记)“, ”귀거래사(歸去來辭)“ 같은 도연명(陶淵明)의 짤막한 작품들로 시작해 한유(韓愈), 구양수(歐陽修), 소식(蘇軾) 등의 간결하고 아름다운 작품들로 넘어갔다.
중요한 몇 작품을 외우게 하면서 그 뜻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운율을 파악하게 하셨다. 그리고는 그 문체를 따라 글을 쓰게 하셨다. 이 공부방은 1년 남짓 계속되었고, 진도가 나아감에 따라 다른 책에 실린 작품들도 배워 나갔다. 외울 것이 많았고, 고전한문으로 글과 편지 쓰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을 수 없다. 글쓰기가 힘든 큰 까닭이 우리 공부가 일상생활과 거리가 멀고 관계가 없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내게 따로 서예 연습을 시키셨다. 당신 자신 글씨쓰기를 좋아하신 아버지는 안진경(顏眞卿)의 글씨체를 익혀주셨다. 그때는 나도 열심히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언젠가 연습을 그만두고 말았다. 내 일생을 통해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린 한 가지 실패다.
시문(詩文)에 대한 관심도 물려주고 싶어 하셨다. 〈시경(詩經)〉의 몇몇 작품과 〈이소(離騷)〉의 일부 내용, 그리고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로 시작하셨다. 나중에는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에서 뽑아 읽었고 많은 내용을 나도 즐겨 외웠다. 왠지 아버지는 그런 시 짓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으셨고 권하신 일도 없었다. 중국 최고의 시인들이 보여주는 넓이와 깊이를 알아보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신 것 같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종종 궁금한 마음이 들곤 했다. 투철한 유학자이신 그분이 〈논어〉나 〈맹자〉 같은 유가 경전을 꼼꼼히 읽도록 가르치지 않으신 까닭이 무엇일까. 4서 가운데 〈대학〉과 〈중용〉에는 시간을 쓰셨고, 특히 〈대학〉 내용의 철저한 이해에 공을 들이셨다. 후에는 한유와 구양수 등의 글에 나타나는 유가사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셨다.
장재(張載), 정호(程颢)、정이(程颐), 주희(朱熹) 등의 신유가 사상은 가르치신 일이 없고, 나중에 공부할 대상으로 언급만 하셨다. 〈논어〉의 주석에 나타나는 것 같은 그들의 사상이 내게 너무 어려운 것이어서 공부를 가로막는 난관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신 것 같다. 당신 자신의 공부 과정에서 손수 겪으신 어려움을 떠올리셨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난징에서 대학 때 익힌 존 듀이의 교육 이론에 따라 아들의 교육에서 자발적으로 모색할 공간을 넓게 만들어주려는 뜻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찌됐든 중요한 역사가들의 글과 그 속에 나타나는 역사상의 영웅과 악한들의 기록에 관심을 키워주신 것이 아버지가 하신 일이다. 〈고문관지〉에 실린 좌구명(左丘明)의 〈좌전(左傳)〉 몇 대목으로 시작해서 사마천과 반고의 글로 나아갔다. 후에는 〈사기〉와 〈한서〉의 본문을 더 많이 읽어보라고 권하셨다.
사마천과 반고의 문체만을 칭송하시면서도 생동감 있는 그 내용에 내가 빠져들 것을 알고 계셨다. 예를 들어 항우(項羽), 진나라를 무너트렸으나 한나라 유방(劉邦)에게 모든 것을 잃고 마는 위대한 용사의 이야기는 기억이 생생하다. 또 하나 기억이 뚜렷한 것은 흉노에 항복한 한나라 장군 이릉(李陵)이 항복한 이유를 밝힌 편지다. 편지를 보낸 상대 소무(蘇武)는 반대의 길을 걸은 사람이었다. 소무는 포로가 된 후 항복하지 않고 19년간 황야에서 양치기를 하다가 한나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이런 글의 문체만을 평가하셨지만, 중국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책 중에는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을 축약하고 청나라 시대까지 연장한 책이 있었다. 이 〈강감이지록(綱鑑易知錄)〉이란 책 내용을 설명하신 일은 있어도 읽도록 권하지는 않으셨다. 역사에 관심이 적으신 데다 고전작품의 축약본에는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후에 중국 역사의 연속성에 흥미를 느끼면서 사마광의 작품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위대한 작품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잘 활용할 수 있는 준비를 아버지가 간접적인 방법으로라도 해주신 것이다.
일본 점령기에도 내 공부가 계속될 수 있도록 아버지는 이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준비해 주셨다. 그 시기에 나는 주워듣는 여러 방언을 표준 중국어에 곁들여 썼다. 장쑤식 표준어가 우리 가족의 특색이었는데, 당시는 어떤 식 표준어라도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였다.
그 시절의 공부가 모두 자기향상을 위한 진지한 것은 아니었다. 가르치는 요령을 배우게 된 특별한 경험도 기억난다. 젊은 첩에게 중국어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한 부유한 중국인이 있었다. 아버지는 체통에 맞지 않는다 여겨서 사양했으나 그 사람이 부탁을 거두지 않자 결국 아들에게 맡겨보겠다고 제안하셨다. 그 사람은 나랑 얘기해 보고는 열두 살밖에 안 된 내게 맡기기로 했다. 젊고 예쁜 여자였는데 배우는 데 열심이었다. 무엇을 가르칠지 아버지 지침을 받아 그대로 했다. 가르치는 일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몇 달 진도를 보고 그 사람은 만족해서 후하게 느껴지는 보수를 주었는데, 더 큰 소득은 소통해 가며 남을 가르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동안 부모님은 나를 바닥에서 재워야 하는 좁은 방에 불만이 쌓여 다른 곳을 찾았다. 호끼엔협회 같은 공공건물에서 지내는 데는 다른 문제들도 있을 수 있어서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떠나고 싶어 하셨다. 그때 예 부인이라는 분이 큰 저택의 방 하나를 빌려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직원 한 사람과 방을 함께 쓸 수 있다는 점이 부모님에게 매력적인 조건이었을 것이다. 예 부인은 상하이의 성 요한 대학 졸업생인 남편이 아버지와 아는 사이라며 우리를 반겼다. 두 분이 어떻게 아는 사이였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예 부인도 전에 교사였기 때문에 알게 되었을 것 같다.
그래서 또 이사했고, 이번에는 뉴타운으로 돌아갔다. 예 씨는 사업가로, 쿠알라룸푸르의 본사에 많이 가 있었다. 우리에게 세주는 것이 부인의 안전에도 보탬이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나도 침대를 쓸 자격이 있다고 예 부인이 고마운 생각을 해준 덕분에 그 집 자전거가게에서 일하는 청년과 함께 쓰는 방에 내 침대도 들어왔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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