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22곡 판소리로 풀었다…원작의 '한' 모질게 녹인 소리극 ‘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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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 돌으셨소? 지금이 소리할 때요? 지 딸 눈깔이 멀었는디.”

소리극 '서편제; 디 오리지널l' 에서 '아비' 가 딸의 눈에 청강수(염산)을 붓는 장면. 연합뉴스
가슴 속에 한을 심고, 눈으로 뻗칠 기운을 목으로 돌리기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한 아비. 울부짖는 딸에게 그는 “나도 니도 소리꾼이여. 그럼 소리로 다 허는 거여. 기쁘나 슬프나 원통허나 애통허나 그걸로 풀고 사는 거여”라고 말한다. 영화 ‘서편제’로 익히 알려진 장면임에도 객석에선 새삼 한숨과 탄식이 흐른다.
지난달 17일 서울 국립정동국장에서 개막한 소리극 ‘서편제; 디 오리지널’은 1976년 발간된 이청준(1939~2008)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같은 원작을 토대로 한 1993년 개봉 영화(감독 임권택)는 한국 영화 최초로 서울 관객 100만명을 넘기는 기록을 세웠다. 영화의 경우 등장 인물에게 원작에는 없는 이름을 붙여줬다. 아비는 유봉, 딸은 송화다. 2010년 초연하고 2022년까지 다섯 번 공연한 뮤지컬 서편제는 딸의 동생 동호가 현대 음악을 한다는 설정을 추가하기도 했다.

소리극 '서편제; 디 오리니절'에서 아비가 눈먼 딸을 부축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에 비해 ‘서편제 : 디 오리지널’은 원작에 한층 충실하게 소리꾼들을 다시 ‘아비’, ‘소녀’로만 칭한다. “이름도 없이 떠돌았던 수많은 소리꾼의 삶을 전하고자 했다”라는 게 제작진의 의도다. 영화에선 훗날 아버지가 딸을 눈 멀게 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만, 소리극에선 원작 소설과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끝내 함구한다.
소설에서 딸의 눈을 멀게 한 아비의 행동은 현대적 시각에서 볼 때 논란거리다. 청강수(염산)를 뿌려 제 눈을 멀게 한 아비의 행위를 딸이 수긍하게 된다는 설정 역시 온전히 동감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작품은 원작 소설의 내용을 밀고 나간다. 지난 9월 공연한 국립창극단의 ‘심청’이나 오는 14일 개막 예정인 국립국악원의 ‘춘향단전’과 같이 시대 맥락에 맞춘 변주는 없다.
연출자 고선웅은 “어설프게 만들어 본질을 훼손하는 대신 원작 텍스트를 충실하게 표현하고 싶었다”라며 “원작자인 이청준 선생님이 보시고 행복해하실 작품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라고 말했다. 제목에 ‘오리지널’을 붙인 이유다.
고 연출은 또 “이 인물이 우리 시대에 맞느냐 안 맞느냐는 의미가 없는 것 같다”라며 “모질고 비정하고 폭력적인 아버지지만 하나의 캐릭터이며 문학은 문학으로 충분히 허용돼야 한다”라고 밝혔다.
‘소리극’ 에도 충실하다. 기존 뮤지컬, 창극 ‘서편제’는 동서양의 다양한 악기를 사용했지만, 이 작품은 소리꾼과 소리북 만으로 무대를 채운다. 춘향가·심청가 등 판소리 다섯 바탕의 핵심 대목을 포함해 총 22곡을 들려준다. 인물의 감정과 이야기 상황에 걸맞게 배치해 몰입도를 높였다. 눈먼 소녀를 두고 아버지가 죽는 장면은 판소리 ‘춘향가’ 중 ‘이별가’로 표현했다. 폐가에서 한겨울을 보내는 부녀의 처지는 ‘흥보가’의 ‘가난타령’으로 드러냈다.

소리극 '서편제; 디 오리지널'은 소리북과 소리꾼의 소리만으로 150분간 무대를 가득 채운다. 연합뉴스
마지막 장면에는 한승석 음악감독이 작창(作唱·창을 지음)한 소리 ‘아매도 사랑이야’가 나온다. 이 작품의 유일한 ‘신곡’이다. 한승석은 “소녀가 가진 한을 소리로 승화한다는 게 이런 것이란 마음으로 만들었다”라고 전했다. 고선웅과 한승석은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와 ‘귀토’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합을 맞췄다.
아비 역은 남원시립국악단 악장 임현빈과 국악밴드 ‘이날치’ 멤버 안이호가 맡았다. 소녀는 국립창극단 단원 김우정과 서울대 국악과 재학중인 박지현이 연기한다.
국립정동극장에서 이달 9일까지 공연한다. 이후 장소를 옮겨 오는 15~16일에는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21~22일에는 춘천문화예술회관 무대에서 관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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